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로 일컬어지는 피에트르 브뢰겔(1525-1569)은 흔히 '농민화가'로 불린다. 이는 그가 대지를 기반으로 소박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플랑드르 농민들의 모습을 따스한 휴머니즘의 정신과 예리한 사회비판의 안목으로 관찰하면서 묘사했기 때문이다. 역시 화가인 장남 피에트르 브뢰겔 2세와 차남 얀 브뢰겔 등과의 구분을 위해 대(大) 브뢰겔로 불리는 브뢰겔 1세는 지난 400여년간 찬사와 인기를 한몸에 받아왔으면서도 정작 화가 자신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미술사가인 월터 S.깁슨이 쓴 전기 「브뢰겔」(김숙 옮김.시공사)은 브뢰겔의 찬미자뿐 아니라 미술에 문외한이 일반인에게도 브뢰겔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폭을 넓혀주는 훌륭한 미술사 연구서이다. 저자는 브뢰겔을 단순한 농민화가로 치부하는 사고방식을 배제하면서 교양있는 인문주의자로서의 브뢰겔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즉, 플랑드르 르네상스기의 부유하고 부르주아적인 안트베르펜에 뿌리를 두고 교훈적 이야기와 속담을 즐긴 도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 화가 브뢰겔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활기찬 유머와 인간 인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의 진부한 아이디어를 강력하고도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변화시킨 시각적 상상력을 브뢰겔 예술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다. 특히 현재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는 네덜란드 수사학회 문학과의 관련성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브뢰겔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여러 사실들, 즉 당시 플랑드르 미술계의 분위기와 그의 알프스 여행,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계극장'으로서의 풍경과 브뢰겔의 독자적인 지상ㆍ지옥 장면, 도시로이주하면서 나타난 양식의 변화 등을 상세히 살핀다. 이어 케르미스(축제)를 다룬 주제, 당시 혼란 시대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 등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쳐보이면서 네덜란드 풍경화뿐 아니라 후대 미술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예술적 업적을 집중조명한다. 브뢰겔의 작품 150여점이 수록돼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208쪽. 1만2천원.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