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의 능가산 내소사는 변산반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천왕문까지 6백여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맑은 향기를 내뿜는다. 오랜 세월과 함께 단청이 다 벗겨진 대웅전에는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숨쉰다. 고색창연하면서 정갈하고 단아한 곳,그래서 평일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내소사에서 회주 혜산(慧山.69)스님을 만났다. "훌륭한 말씀을 들으러 왔다면 잘못 찾아오셨나 봅니다. 시골에 사는 중이 뭐 아는 게 있어야지요" 혜산 스님은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했을 때부터 "해 드릴 말씀이 없는데…"라며 여러차례 난색을 표했다. 때문에 "차라도 한 잔 마시게 해달라"며 떼를 써 만나게 된 자리다. 그래서 은사인 해안 스님(1901∼1974)에 관한 이야기부터 물었다. 해안 스님은 백양사 조실이던 학명스님 문하에서 1주일 만에 도를 깨친 선사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며 참선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인물.은사에 대한 혜산 스님의 칭송이 대단하다. "원래 도인은 숨어있는 것 아닙니까. 해안 스님은 선지(禪志)가 훌륭한 데다 후학을 가르치려는 간절한 마음이 남달랐어요. 맑고 깨끗한 생김새에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쉬운 설법,도도한 문장과 글씨,뛰어난 판단력 등 여러 면에서 도인의 풍모를 갖췄던 분이지요" 해안 스님은 그러나 세간에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혜산 스님은 "도가 높아도 시절 인연이 아니면 그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안 스님은 불법이 스님네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부대중(남녀 승려와 신도)이 다같이 공부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러면 얼마나 공부해야 견성할 수 있느냐,1주일이면 된다고 하셨어요. 아주 뛰어난 사람은 말하기 전에 알고(言前開悟·언전개오) 중간쯤 트인 사람은 말 떨어지자 안다는 것(言下開悟·언하개오)입니다. 또한 제일 못난 사람도 1주일만 정진하면 깨친다고 스님은 주장하셨어요" 1주일 정진득도(得道)는 해안 스님이 직접 체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해안 스님은 그래서 30여년 전에 요즘의 사찰수련회같은 1∼3주의 ''특별정진법회''를 마련,대중들을 깨침의 길로 이끌었다. 불법을 깨쳐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몸뚱이의 주인이 여섯이나 되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종노릇을 하고 있어요. 눈 귀 혀 몸뚱이 뜻 등의 주인들한테 시시각각 끌려다니며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잠시도 조용하지 않고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이면 주인 노릇을 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주인노릇을 하려면 주인의 얼굴,주인의 정체를 알아야 하고 그래서 참선공부를 해야 하는 겁니다" 혜산 스님은 "나의 주인을 알고 나면 내 마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며 "그 이상 행복이 없다"고 했다. 도를 통하면 신통한 능력이라도 생긴다는 뜻일까. 대답은 ''아니오''다. "깨친다는 것은 정당한 법도,진리의 당체(當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겁니다. 진리에 부합하며 정정당당히 살고 추호도 무리수를 두지 않지요. 도를 통하면 요상한 재주나 사술이 있을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도 신변신통(神變神通·모습이나 몸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능력) 기설신통(記設神通·앞날을 예언하는 능력) 교계신통(敎誡神通·가르침을 실천해서 갖는 능력) 가운데 교계신통이 으뜸이라 했어요. 신변신통이나 기설신통은 허망한 것이지만 교계신통은 마침내 성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혜산 스님은 "세상사람들이 요상한 걸 좋아하는 것은 힘 안들이고 많은 소득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라며 "노력없이 갖게 되는 것은 모두 빚으로 남는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조실은 깨침의 확신을 주고 이끌 뿐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깨친 뒤에도 오랜 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어려워요. 사량분별(思量分別·생각하고 따지는 것)로는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습(習)이 앞서거든요. 오죽하면 3조인 승찬 스님조차 "도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시비분별을 싫어한다(至道無難 唯嫌揀擇·지도무난 유혐간택)고 했겠습니까" 사무치게 깨닫고 체득해야 한결같은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죽으나 사나 깨쳐야 한다"고 혜산 스님은 목청을 높인다. "불법을 알면 미래가 희망적 낙관적입니다. 왜냐,인과의 법칙을 알면 나쁜 행동을 할 수가 없고 모든 행동과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선업을 쌓으니 미래가 희망적일 수밖에요" 서울대 농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던 혜산 스님은 어릴 때부터 진리와 참된 삶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해안 스님이 쓴 ''금강경 강의''를 읽고 3년 간이나 해안 스님과 편지를 주고 받은 끝에 지난 63년 내소사 지장암으로 출가했다. 그후 40년,혜산 스님은 지금도 내소사 선방에서 수좌들과 동안거를 함께 하고 있다. "한 순간도 내가 수좌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어요. 하지만 아직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했어요. 그동안 법문도 많이 다녔는데 생각해보면 가소로운 일이지요. 어서 확철대오해서 중생들에게 법을 전해줘야 할텐데 시간이 참 바빠요,허허" 혜산 스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산사에 길게 퍼진다. 일주문으로 이르는 전나무 숲길의 향기도 여전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