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山門)을 들어서니 맑은 시냇물 소리가 먼저 반긴다. 계곡 오른편,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에선 "양산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무풍한송(舞風寒松)이 뱉아내는 솔바람이 폐부 깊은 곳까지 씻어준다. 경남 양산의 영축총림 통도사 시탑전(侍塔殿).신라때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한 통도사 5층석탑을 모시는 전각이다. 이 곳에서 호명 스님(87.통도사 한주)의 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검은 고무신이 놓인 곳만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서자 노장(老長)은 오래된 지인(知人)을 맞는 것처럼 반가운 표정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신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친다기에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한 몇년은 더 해야지요. 그러다가 마무리는 글로 써서 책을 낼 예정입니다. 가르치다 보면 자꾸 살이 붙어서 책을 쓴다고 한 지 오래 됐는데 몇 년째 그냥 넘어갑니다. 책이 나오면 심성 쓰는 법을 예리하게 밝힐 것입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까요" 어린 시절 인력거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던 호명 스님은 1939년 화엄사에서 포응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당시로선 늦깎이였다.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한 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금강산 장안사 토굴에서 요양하다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해인사,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뒤 상원사 정혜사 봉암사 등에서 참선했지만 선방생활로만 일관하진 않았어요. 참선만으로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삼위일체가 되지 않아요. 종교적 신앙과 철학적 이론,과학적 실천이 삼위일체가 돼야 수행이 되고 선이 되지요" 노장은 그래서 51세때부터 천성산 조계암에서 22년간 1천여평의 밭을 일구며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을 했고 참선에 앞서 경전을 공부하라고 강조한다. 스스로도 다른 스님의 법문이나 강연을 듣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수행의 끈을 놓지 않는다. 최근에는 숭산 스님의 제자인 미국인 현각 스님의 강연을 들으러 울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노장은 "나는 돈오(頓悟)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깨달음에 관한 스스로의 체험이 있고 일가견을 가졌을 뿐….누가 와서 뭘 물어보든지 든든한 것은 이런 '재산'이 있기 때문이란다. "깨침이란 무주공처(無住空處)에서 잡아내는 거라서 자기 노력과 인생의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참으로 깊은 체험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불교는 가장 알기 쉽고 들어가기도 쉬워요. 자연의 법칙이 이 순간에 요구하는 것에 맞춰서만 살면 되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이 자연의 법칙,즉 필연에 순응하지 않고 어거지로 살다가 불행해진다고 노장은 경책한다. 욕심때문에 자연을 정복해도 또 욕심으로 해결할 일이 나오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욕심을 채우려 하면 항상 욕심과 불안,고민 가운데서 살게 돼요. 좋은 게 있으면 반드시 나쁜 것도 있어요. 입이 있으면 항문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거든.어느 하나만으로는 살 수가 없지요. 세상은 서로가 봉사하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입이 저 좋으라고 밥을 먹나요. 몸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요" 노장은 이런 이치를 변증법과 용수보살의 중론(中論)을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대립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양면을 인정해야지 어느 한쪽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세상은 서로의 관계성(연기법)으로 존재할 뿐 홀로 독립적인 것은 없다는 얘기다. "사람의 몸을 보세요. 우주의 축소판,소우주예요. 오른손도 내 손이요,왼손도 내 손입니다. 미국도 영국도 이슬람도 다 내 손이요 내 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란 말이지요. 미국 무역센터가 왜 날아갔나요. 이런 이치를 모르고 다른 민족,다른 종교를 무시했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한 몸인데 신체 일부를 긁어 놓으니 아플 수밖에요" 노장은 이같은 이치를 선(禪)이라는 한자로 다시 설명해준다. 선이란 홑 단(單)에 보일 시(示),즉 하나를 보인다는 뜻이니 내 몸이 곧 우주요,우주가 한 몸임을 깨닫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까닭 없는 짓을 하면 안돼요. 중들이 까닭 없이 집(절)을 크게 짓고 방을 크게 쓰는 것도 옳지 않아요. 무엇을 하든 까닭을 알게 되면 빚을 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는 일 하나하나가 법이 되고 선(禪)이 되지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지요" 노장은 "겉모습을 보지 말고 마음의 달(心月)을 보라"고 강조한다. 마음의 달,달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그래야 현상에 속지 않는다는 말이다. "흐릿한 명태눈 말고 확대경,투시경,업경대를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한다"고 노장은 덧붙인다. 어떻게 공부해야 그런 눈을 가질 수 있을까. 공부하고 실천하라는 것이 그 답이다. "깨달음은 형상이 없어 말로 할 수는 없지만 그 관문까지 안내는 해줄 수 있어요. 다만 관문을 넘어서는 것은 자기노력과 의지에 달렸지요" 노장은 "어린애한테도 배울 게 있다"며 끊임없는 정진을 당부한다. 벽에 걸린 그림 하나가 노장의 자화상이다. 고개를 굽히고 앉아있는 수행자의 모습 옆에 이런 글씨가 씌어있다. '언제나 머리 숙이고 정진하는 숭고한 천진불(天眞佛)'.천진불이 있어서 통도사 계곡의 물소리와 솔바람이 더욱 맑아 보인다. 양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