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는 요즘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 신세대식 사랑법이다. 그것은 소위 "쿨"한 감성의 산물이다. 서로의 감정을 깊이 신뢰하지만,결혼이란 통념을 가볍게 무시하고,자신의 상처도 동반자에게 전가하지 않는 태도다. 멜로영화 "와니와 준하"(김용균 감독)는 이런 코드들에 바탕한 요즘 20대 동거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톱스타 김희선(25)은 이 작품에서 시나리오작가 준하(주진모)와 동거하는 26살의 애니매이터 와니역을 맡았다. "자귀모""패자부활전""비천무" 등에서 발랄하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다가섰던 그녀가 여리고 내성적인 캐릭터로 변신했다. "와니는 제 나이와 비슷할 뿐더러 실제 성격과도 일면 상통하죠.내면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연기가 즐거웠어요" 극중 와니는 "달팽이" 같은 여자다. 겉은 딱딱하고 냉정하지만,속은 여리고 상처 입기 쉬운 캐릭터다. 크게 웃지도 소리지르지도 않는다. 김희선은 연기자로서 남에게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처지와 다소 폐쇄적인 실제 성격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누드"화보집 파문과 "비천무"의 연기에 대한 "혹평"은 그녀에게 내면을 성찰하는 전기를 마련해 줬다. "털털한 성격의 와니가 되기 위해 아끼던 긴 생머리를 세 번이나 과감히 잘랐어요. 틈나는대로 그림그리기 연습도 했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와니는 김희선 특유의 도회적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다. 화장기를 말끔히 걷어낸 얼굴,삐친머리와 헐렁한 파자마 차림으로 피곤한 듯 하품을 연방 해댄다. 창작자의 자연스러운 사고와 행동을 표출한 것이다. 무심한 듯한 겉모습과 달리 와니의 내면은 생채기로 화끈거린다. 첫 사랑의 이복동생이 귀국한다는 전갈을 받자 잠복했던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와니는 아픈 추억을 여과지에 통과시켜 조금씩 음미한다. 영화는 그녀의 추억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하나씩 추가하고 그녀의 감정흐름에 맞춰 준하의 반응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와니가 가진 사랑의 상처는 결국 추억으로 변해 있다"며 "사랑이란 관점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와니는 옛사랑의 출현에 흔들리지만 현재 사랑의 부재를 통해 확신으로 바뀐다. 준하가 냉장고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메모를 붙여놓고 며칠간 집을 비웠을때 와니는 눈물을 쏟고 만다. "사랑하는 준하가 떠났을 때 실제처럼 공허함과 외로움이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그는 실토한다. 김희선은 앞으로 배역을 까다롭게 선택할 작정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배역을 해냈을때 만족감이 어떤 것인지를 이번 작품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쏟은 만큼 아쉬움도 컸다. "자신있게 연기했던 장면들을 다시 보니 만족스럽지 않아요.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합니다" 시험치른뒤 틀린 답이 많이 생각날 때 합격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속설이 사실로 증명될까.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 '와니와 준하' 줄거리 ] 와니와 준하는 춘천에서 동거한다. 와니는 유학을 떠난 첫사랑의 연인이자 이복 동생인 영민(조승우)을 잊지 못한 채 그의 방을 열쇠로 잠가두고 아픈 기억을 삭이며 지낸다. 영민의 귀향 소식과 함게 영민을 짝사랑하던 후배 소양(최강희)이 집으로 찾아온다. 와니의 기억에는 아버지가 영민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날,영민과의 입맞춤,소양(최강희)과 셋이서 어울리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하나둘씩 스쳐간다. 준하는 와니의 변화를 눈치채고 가슴이 아프다. 도입부와 마지막부분에선 와니와 준하의 어린시절 만남이 애니매이션으로 처리됐다. 2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