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립음악원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중인 영국출신 피아니스트 고든 퍼거스-톰슨은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의 작품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다. 그가 ASV 레이블을 통해 시리즈로 내놓고 있는 스크랴빈의 피아노 작품 전곡집은 그 산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5번째 앨범까지 나와 있다. 가장 최근에 출시된 것이 1897년부터 1914년까지 사이에 작곡한 전주곡 41곡과 5개의 즉흥곡, 2곡의 피아노 소품 등을 수록한 음반이다. 수록곡들은 스크랴빈의 초기 작품부터 타계하기 직전의 후기 작품까지를 망라하고 있는데 대개 연주시간 1-2분 내외의 짧은 곡들이다. 스크랴빈의 전주곡들은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나 연습곡들보다는 대중적 인기가 덜한 편인데 특히 초기 작품들에서는 쇼팽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쇼팽의 전주곡들과 마찬가지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1897년에 작곡된 「4개의 전주곡 작품 22」의 경우 흔히 알려진 스크랴빈의 신비주의적 화성법보다는 쇼팽의 시적인 낭만주의에 가까운 화성과 음렬(音列)이 자주 나타난다. 이같은 특징은 1887-89년에 작곡된 「마주르카풍의 즉흥곡 작품 2」나 1894년작품인 「마주르카풍의 2개의 즉흥곡 작품 7」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다가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2개의 전주곡 작품 67」이나 「5개의 전주곡작품 74」에 이르면 이른바 '신비화음'이라 일컬어지는 스크랴빈 특유의 증4도 또는 감4도의 화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곡 전체를 신비주의적 색채로 휘감는다. 퍼거스-톰슨의 연주는 스크랴빈의 초기 피아노 작품에 깃들어 있는 쇼팽적인 정서를 십분 살려내면서도 독자적인 화성어법이 강하게 나타나는 후기 작품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성격을 극대화하는 표현의 미학을 보여 준다. 연주 자체가 독창성이 강하거나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최대한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루바토 사용을 절제해 신뢰감이 간다. 그의 페달링 사용은 특히 인상적인데, 약음페달과 울림페달의 적절한 사용에 의해 때로는 음울하게 침잠하는 듯이, 때로는 광포하게 날뛰는 듯이 표현되는 음색의변화는 아주 매력적이다. 각 곡의 성격적 특징을 잘 끄집어내 강조하는 것도 칭찬할 만하다. 이 음반은 퍼거스-톰슨이 '스크랴빈 스페셜리스트'로서 이미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