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하인리히 이그나츠 프란츠폰 비버(1644-1704)는 체코 서부 보헤미아 지방의 바르텐베르크(현 슈트라츠포드 랄스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궁정음악가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음악적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것, 생애의 대부분을 궁정음악가로서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서 지내며 상당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정도이다. 비버의 작품들은, 다른 많은 바로크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세인들에게 잊혀져 있었다. 그의 작품이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인데, 특히 1905년 출판된 '15개의 미스터리 소나타'는 그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비버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15개의 미스터리 소나타'는 이른바 스코르다투라(scordatura) 기법을 사용, 각 곡마다 바이올린 현의 조율을 다르게 하도록 작곡됐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말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 멜쿠스가 원전연주로 전곡 녹음하면서부터였다. 멜쿠스의 연주는 바로크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야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맛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고 앤드루 맨즈같은 후대의 원전연주자들에게도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미스터리 소나타와 함께 비버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1681년에 작곡된 8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오늘날 미스터리 소나타보다는 덜 연주되지만 보다 더 바이올리니스트의 거장적인 기교를 요하는 작품이다. 영국의 고음악 전문 레이블인 ASV에서 최근 발매한 비버의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에는 이 8곡의 소나타중 2,3,5,7번과 함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사칼리아와 바이올린, 베이스, 통주저음을 위한 니시 도미누스(Nisi Dominus)가 함께 수록됐다. 연주는 리더 겸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니카 휴거트,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에밀리아 벤자민, 하프시코디스트 겸 오르가니스트 게리 쿠퍼, 테오르보 연주자엘리자베스 케니 등으로 구성된 고음악 연주단체 소네리가 맡았다. 비버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은 3악장이나 4악장 구조로 돼 있는 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 소나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기본적으로 악장 구분이 없는 단악장 구조로 돼 있으며 악상이 기승전결양식보다는 환상곡풍이나 무곡풍, 또는 짧은 서주가 붙은 변주곡풍 등 양식이 매우 자유롭다. 같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바흐나 헨델의 작품에 비해서도 훨씬 자유로우며 구조가 애매모호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작품도 많다. 악기 편성면에서도 18-19세기적 개념의 소나타라기보다는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트리오 소나타에 가깝다. 그런 가운데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수준의 현란한 기교를 강조하는 기법들이 상당수 표현돼 있어 비버가 작곡가뿐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비스런 분위기에 가득찬 짧은 아다지오에 이어 네 개의 변주로 구성된 지그풍의 프레스토가 이어지는 5번 마단조의 경우 독주 바이올린의 물흐르듯 거침없는 활보와 화려한 장식음에 의한 변주가 인상적인데 휴거트는 견실하면서도 여성다운 섬세한 감성이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 준다. 다른 3개의 소나타의 분위기 역시 흡사한데 2번 라단조 소나타의 도입부에서 통주저음으로 연주되는 라단조 화음의 아주 긴 지속 위에 펼쳐지는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풍과 그에 이어지는 다채로운 변주곡은 비버 음악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15개의 미스터리 소나타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사칼리아는 G, F, E, D♭음이 65번이나 반복되는 몬테베르디풍 통주저음부 위에 독주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에 의한 특유의 신비스러운 선율이 거듭 나타난다. 어찌보면 즉흥연주의 습작같기도 한 이 작품에서 휴거트는 프레이징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도 바이올린 독주의 비르투오시티를 강조하는 놀라운 활솜씨를 보여준다. 1995년 출시돼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앤드루 맨즈의 비버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에 비하면 파격적인 해석이 주는 독창성의 미학은 덜하지만 앙상블이 충실하면서도 비버 작품 특유의 섬세한 신비로움이 은은히 묻어나는 호연이라 할 만하다. 독주 바이올린, 통주저음과 함께 베이스 가수의 노래가 등장하는 니시 도미누스(주가 아니시라면)는 성서의 시편(詩篇) 제126편, 즉 솔로몬 왕이 쓴 「순례자의 노래」를 음악으로 꾸민 것인데 베이스 토머스 구드리의 단아한 음성과 함께 거의 소개된 바 없는 비버의 성악곡을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