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몸부림인가 인간의 "깃발"인가. 하루 하루 생계와 씨름하는 세일즈맨.오라는 데는 없고 갈 곳만 많은 이들의 삶을 생각하면 우선 명치끝부터 아릿해져온다.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는 그 어떤 인간적 측면도 스며들 틈이 없다. 이 30대 중반의 사내는 돈을 벌어 단란한 가정을 이루려 하지만 책을 사는 사람이 없어 지독한 가난에 허덕인다. 그 시절 누가 '밥'이 아닌 '책'에 돈을 쓰겠는가. 급기야 아내마저 급성 뇌막염으로 죽자 사내는 절망한다. 그는 돈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아넘긴 뒤 그 돈을 그날 저녁 헛되이 다 쓰고 여관에 들어가 자살하고 만다. 지속적인 산업화 이후 우리는 세일즈맨의 또 다른 유형들과 마주친다. 최수철의 '타임킬링'(1982년)에서 대학을 나와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회원가입 세일즈맨이 된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구한 날 영화관이나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세상과의 대결에서도 진 80년대 '우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날마다 신발굽이 닳도록 뛰어다니는 직업이니 고단하기도 하려니와 뜻밖의 일탈도 종종 생긴다. 이동하의 '따뜻한 돌'(1982년)에는 '전국 우수 부녀 판매사원 초대 큰잔치'에 참석한 지방영업소의 부녀 사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과 가정으로부터의 일시적 해방감에 젖어 낯선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른바 '큰 손' 고객들이 뻗치는 '검은 손'의 그림자 또한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몰락한 집안의 노처녀 딸이 보험사원으로 나서서 가계를 돌보는 장면을 정길연의 '암전'(1999년)에서 볼 수 있다. 그녀의 슬픔은 싱싱하고 푸르른 육체에서 비롯된다. 소장과의 스캔들에 이어 고객의 성적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절망의 벼랑으로 달려가는 처녀다. 김영하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1997년) 주인공은 자동차 영업소 세일즈맨이지만 차량 판매는 뒤로 밀어 두고 반지하 셋방에 파묻혀 오로지 컴퓨터 게임 '삼국지'에만 몰두한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지점장과 남의 고객까지 가로채 실적을 쌓는 동료 김상근을 게임 속 인물로 동일시해 가상의 복수를 즐긴다. 하성란의 '깃발'(1999년)에는 시승용 승용차 닦기를 차 팔기보다 즐기는 자동차 외판원의 몰락이 깃발로 상징화된다. 이 밖에도 양문길의 '다섯 사나이가 계단을 오르다'(1997년),김종은의 '세일즈맨의 하루는'(2001년) 등을 포함해서 우리의 많은 소설들은 세일즈맨의 암울하고 답답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늘지고 소외된 삶의 일면을 통해 자본주의 구조의 맹점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소설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생의 의미라는 게 늘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공선옥의 '고적(孤寂)'(2000년)에서의 보험 외판원 언니는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꾸리는 억척 아줌마다. 그녀는 보험영업을 계기로 결혼 후 연락을 잘 하지 않는 동생을 비롯 자신이 알던 사람들을 자주 만나 그동안 잊고 있던 정을 회복하려 한다. 최악의 경우 '영혼'까지 팔아 하루치의 '밥'을 사는 사람들.이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돈의 논리 이상으로 인간적인 정을 꽃피우는 '세일즈'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우리 시대의 '거울'들이다. 문흥술 < 문학평론가.서울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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