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작가 박광진씨(67)는 화단에서 작가로서보다는 미술행정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언제 개인전을 가졌는지 기억하는 이가 없을 정도다. 대신 그는 90년대초 미술협회이사장,유네스코 산하기구인 국제조형예술협회(IAA)수석부회장,95년 '미술의 해'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미술행정일에 많이 관여했다. 미술계에서 그는 '외교관'으로 불린다. 그런 그가 오는 7일부터 서울 인사동 선갤러리와 인사아트센터 두 곳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중앙무대인 서울에서의 개인전은 24년만이다. 전시 주제는 '자연의 소리'.인사아트센터에서는 1백호 이상 대작 15점을,선갤러리에서는 소품 25점을 각각 선보인다. 기존의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추상성을 화면에 접목시킨 확 달라진 신작을 내놓아 주목을 끈다. 작가의 나이나 화단에서의 위치를 고려하면 우리 풍토에서 쉽지않은 변신이다. 그의 신작은 구상과 추상을 결합한 화면이다. 광활한 들판에 서있는 억새풀에서 오묘한 생명력을 찾는 구상화면은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접목된 추상은 수직 그래픽을 옮겨놓은 미니멀 계열의 화면이다. 구상은 수평,추상은 수직으로 각각 화면을 구성했다. 구상과 비구상의 공존,수평과 수직에 의한 엄격한 화면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화면이 김흥수 화백의 '컴비네이션'(조화)처럼 엄격히 분할돼 있는 것도 아니다. 구상과 추상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화면분할이다. 박 화백은 많은 화단의 시선을 의식해선지 이번 서울개인전에 앞서 프랑스에서 신작에 대한 검증작업을 거쳤다. 지난해 11월 파리 유네스코본부 미로홀과 지난 9월 파리 무방스갤러리에서 각각 열렸던 초대전에 신작들을 출품했다. "무방스갤러리에서 돌아갈 때 한 점도 가져갈 필요없이 다 팔릴 거라고 자신하더군요. 미국 테러사건 영향으로 다 팔리진 않았지만 현지에서 반응이 좋았습니다" 박 화백은 무방스갤러리측과 향후 10년간 전시를 열어주는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그가 변신을 시도한 계기는 미협 이사장 시절이었다. "미협 이사장 자격으로 외국에 자주 출장을 가면서 현대추상미술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미협 이사장 직을 맡은 동안 작가로서는 잃는 게 많지만 작업이 바뀌는 계기가 된 셈이죠" 박 화백은 "그렇다고 추상으로 완전히 전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말한다. 구상을 계속 유지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미협 이사장 시절 건축비의 1%는 미술작품을 설치토록 한 의무조항을 입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 작가로 돌아와 변신한 신작들을 보여줌으로써 획일적인 양식이 만연된 우리 사실회화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20일까지.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