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동시대의 삶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중에서도 소설은 인생의 단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는 세상의 높낮이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땀이 배어있다. 강물처럼 흐르는 슬픔이 있고 산을 옮길듯한 분노가 있고 온몸으로 솟구치는 희열의 순간도 담겨 있다. 그 모든 희노애락의 밑바닥에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함께 녹아 있다. 지난 1백년동안 발표된 우리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을 직업 유형별로 분석하고 그 속내를 하나씩 들여다보기로 한다. '한국문학전집'(삼성출판사 등 4종)과 곧 나올 '통일문학전집'을 중심으로 1천여편의 작품 속에서 주제가 뚜렷한 10개의 직업군을 골랐다. 첫번째로 '장돌뱅이'들의 세계를 살펴본다. 앞으로 발품을 팔아 하루하루 생계와 승부하는 '세일즈맨'과 '노동자''예술가''상인''봉급생활자''전문직''작부.호스티스''기업인''특수 직업인'들의 삶과 애환을 차례로 짚어볼 계획이다. 이번 시리즈 "문학과 삶-소설속의 직업"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문학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국내 언론 최초의 시도다. 작품을 보는 안목과 분석력이 뛰어난 박덕규씨와 문학평론가 정호웅.문흥술.방민호씨가 집필을 맡고 인터넷서점 '모닝365'가 후원한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 우리 소설사 곳곳에는 남루한 행색에 검붉은 얼굴의 남녀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고갯길을 아득히 넘어가는 풍경이 나온다. 몇 푼의 이문을 얻기 위해 발바닥 족문이 닳도록 산길 들길 물길을 걷고 또 걸었던 장돌뱅이들이다. 길은 외줄기,그들 앞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자신과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의 생존을 위해 걸어야만 하는 비바람 눈보라 속의 그 외줄기 험로는 준엄하여 감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란 문장 하나로 뭇 사람의 숨을 멈추게 했던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1936년)의 아름다운 문체,달빛처럼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서정의 아래에 놓인 것은 장돌뱅이 허생원의 외롭고 누추한 평생이다. 그는 나귀 한 마리를 벗삼아 이 장에서 저 장으로 평생을 떠돌았다. 누구나 누리는 성과 가정의 행복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됐으니 참으로 가련한 한 평생이다. 아름다운 달밤 풍경도,옛 기억도 가릴 수 없는 저 헐벗음의 비애.그 앞에 서면 언제나 깊이 아프다.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1997년)는 60년 세월을 넘어 허생원의 그 비애를 따뜻이 위무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허생원처럼 나귀 한 마리를 벗삼아 평생을 외롭게 떠돌았다. 그런 그의 헐벗은 생애를 여리고 약한,그래서 쉽게 상처 입는 존재들을 넉넉하게 거두는 이타의 온정이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그 온정의 세계 속에서는 짐승조차도 자기 나름의 개성을 사는 생명으로 대접받는다. 이 작품이 이효석을 기려 제정된 '효석문학상'의 제1회 수상작이 된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하겠다. 운명애(運命愛)라는 말이 있다. 운명과 맞서 싸운다,운명을 극복한다 등 운명에 맞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말의 반대쪽에 놓이는 말이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그래서 짐작할 수 없기에 두려운 어떤 절대적 힘의 작용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 두려운 존재를 '운명애'의 태도로 대하도록 가르치는 문화 속에서 우리 민족은 살아왔다. 김동리의 '역마'(1948년)는 장돌뱅이가 걷는 길을 이 같은 운명애와 관련지은 작품이다. 무대는 화계장터.경상·전라 양도를 가르는 섬진강의 경상도 쪽,쌍계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세 갈래 길이 여기서 만나고 헤어지니 구례와 하동에서 오는 길과 화개골을 따라 지리산 속으로 숨어드는 길,또는 구례와 하동으로 가는 길과 지리산 중에서 화개골 10리 벚꽃 사이를 지나 내려오는 길이 여기서 만나고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그 만남은 떠나감을 전제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것,길을 따라 걷는 끝없는 떠나감의 한 점에 불과하다. 이곳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관계만이 맺어진다. 그러므로 그 같은 관계의 일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스스로 상처 입어 견딜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운명이라 여겨 순종하는 것이라는 게 '역마'의 진단이다. 그것은 인간사를 엮어가는 만남과 이별에 대한 오랜 가르침에 닿아 있다.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한승원의 '해변의 길손'(1987년)에 나오는 장돌뱅이 출신 두 친구는 공동경험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두 노인이 있다. 그들은 '동무 소금장사를 했고,동무 옹기장사를 했고… 바람에 배를 깨먹어 버리고 하늘을 지붕삼고 떠돌기도' 했으며,태평양전쟁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저 죽음?세월을 서로 도와가며 뚫고 나왔다. 힘 좋고 재주 많으며 신명조차 넘치던 젊은 장정이 험한 노동의 세월,죽음이 바로 목덜미를 덮쳐오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로 점철된 세월을 넘어오느라 '심술과 부아에 곯은' 늙은이로 삭아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방을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해하고 아파하며,서로서로 부축하며 외로운 노년을 함께 견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저 험한 세월을 동료로서 함께 겪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힘든 경험을 공유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매우 다르다고 하는 옛말의 의미를 새삼 새기게 하는 통찰이다. 장돌뱅이의 세계를 가장 폭넓게 다룬 작품은 김주영의 '객주'(1984년)다. 보부상들과 들병이 등 하층 민중들이 걷는 춥고 외롭고 쓸쓸한 길이 이 작품을 꿰고 있다. 그 길은 그들 하층 민중들의 정한(情恨)과 의리를 담아 싣고 흘러 삼천리 방방곡곡을 이어 엮는다. 그리하여 구한말 격동의 한 시대가 그 속을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실상을 통해 오롯이 떠올랐다. 보부상이 등장하는 작품은 이밖에도 많다. 주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들로 김원우의 '우국의 바다'(1993년),송기숙의 '녹두장군'(1994년) 등이 대표적이다. 정호웅(문학평론가·홍익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