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이른 아침의 서해안고속도로. 계기판을 보니 어느새 제한속도를 훌쩍 넘어 있다. 깜짝 놀라 가속페달에서 발을 뗀다. 뒤처졌던 차들이 아찔하게 앞서 나간다. 뻥 뚫린 도로는 또다시 속도감을 잃게 만든다. 앞선 차에 막히고, 사람들에 치이는 단풍나들이 길을 거꾸로 달리는 기분이란. 화려함보다 서늘함이 어울리는 늦가을 서정미의 정중앙을 향해 후련히 뻗은 서해안고속도로에 올라 서천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금강하구의 신성리 갈대밭. 나홀로 또는 연인끼리 즐기는 오붓한 산책에 제격인 곳이다. 한산을 거쳐 신성리의 금강둑으로 이어지는 길은 시골분위기가 물씬하다. 자연건조를 위해 길 한쪽으로 널어 놓은 벼, 집집마다 발갛게 매달린 감이 정겹다.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멀리 담벼락처럼 버티고 있는 강둑으로 다가선다. 두 길 정도 높이의 둑에 오른다.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인다. 지나온 길 양편은 누렇게 익은 벼가 융단처럼 펼쳐진 논, 앞쪽은 오전의 가벼운 햇살을 튕기며 정지된 듯 흐르는 금강과 갈대밭으로 시원하다. 갈대밭은 그렇게 넓을 수가 없다. 둑을 따라 1km, 폭 2백m 7만여평의 강변을 차지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둑길을 걷는다. 햇살의 방향에 따라 드문드문 하얗게 부서지는 둑길 양쪽 사면의 억새무리도 눈을 즐겁게 한다. 4개의 커다란 간판에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광고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남북의 병사가 인연을 맺게 되는 영화속 장면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는 표시. 관리되지 않아 색깔이 바랜 포스터가 잊혀졌던 기억을 끄집어 낸다. 바람에 부대낀 갈대가 내는 소리에 문득 바다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둑길에서의 상쾌한 발걸음을 만끽하고 갈대밭으로 내려선다. 난쟁이 같던 갈대가 갑자기 커진다. 손을 뻗고 뛰어 올라도 머리술을 잡을수 없을 정도다. 물기를 잃고 누렇게 누운 갈대위로 난 길이 푹신하다. 짧기는 하지만 울창한 숲에 둘러 싸인 것 같다. 길 아닌 갈대숲으로 들어선 사람이 금방 눈앞에서 사라진다. 인기척에 놀란 커다란 새의 날개짓 소리가 확성기를 들이댔다 뗀 것처럼 커졌다 사그라든다. 갈대숲 강변에 걸린 쓰레기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고약한 냄새가 옥의 티. 한산모시관을 거쳐 전어축제로 떠들썩한 홍원항에서 소박한 사람들의 체취를 맡는다. 인근 춘장대해수욕장에 들러 바닷바람을 쐰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게와 조개뿐인 드넓은 해변의 갈매기무리가 가을바다의 정취를 짙게 한다. 지난 여름의 잔해인 것 같은 쓰레기는 치웠으면 좋겠다. 보령을 거쳐 홍성군 광천의 토굴새우젓갈시장으로 짧은 여행길을 재촉한다. 광천토굴새우젓갈시장은 요즘 관광을 겸해 들르는 주부들로 붐빈다. 연중 14도로 유지되는 토굴에서 숙성시켜 드럼통에 담아낸 각종 새우젓이 환절기 입맛을 돌게 만든다. 서천=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