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 다경실(茶經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안경 너머로 뭔가 열심히 메모를 하던 이 절 조실 월운(月雲.73.동국대 역경원장) 스님이 연필을 내려놓으며 멋적은 표정을 짓는다. "뭐 하시던 중이냐"고 묻자 "시간이 아까워서...78년도엔가 나온 "금강경 강화(講話)"인데 다시 쓰려고..."라고 했다. B4용지로 복사한 "금강경 강화"자료엔 연필로 고치고 가필한 자국이 새카맣다. 월운 스님은 평생을 경전연구와 한글번역에 매진해온 학승이다. 특히 은사인 운허(1892~1980)스님의 뜻을 이어 37년만에 완성한 3백18권의 한글대장경은 또 하나의 국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대작불사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역경원장이 세차례나 바뀌었고 뜻을 함께 했던 사람중 여럿이 벌써 고인이 됐다. -다음달 5일 한글대장경 완간 회향법회를 봉행할 예정이신데,소회가 깊으시겠어요. "후련하면서도 마음의 부담감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느라고 해왔지만 지금 다시 보면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게 눈에 띄거든요. 그래서 축하한다는 인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저소리가 나중에 욕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요" -어떤 점이 가장 아쉽습니까. "늘 재정난,인력난을 겪다보니 편집을 만족스럽게 못했어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다보니 매년 일정량의 책을 내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짜놓은 목차대로 원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그 부분을 빼고 뒷권의 원고를 앞권으로 당겨 한 책으로 묶어야 했거든요. 또 아무리 번역을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강학본을 함께 내서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주제별 색인도 붙이지 못했어요" 동국역경원이 올해부터 한글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들어간 건 이런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오래전에 나온 책들은 요즘 어법에 맞게 개역도 하고 세로쓰기는 가로쓰기로 바꾸고 있다. 색인,검색기능도 갖춰 올해 안에 30여권을 인터넷에 올릴 예정이다. -팔만대장경이란 무엇이며 한글 대장경의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즉 불교이론을 다 갖춰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대장경이 한문으로 돼있다보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의 입을 통해야만 경전을 알 수가 있었어요. 한글대장경의 완간은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언어장벽 없이 직접 경전에 다가서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장경은 너무나 방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일상생활에 육법전서의 내용이 다 쓰이는 게 아니듯 대장경을 꼭 다 봐야 할 이유는 없어요. 불경은 인생문제의 종합백화점입니다. 아이에게 재미있는 경전,어른에게 필요한 경전 등 경전마다 특징이 있으니 자기에게 필요하고 맞는 걸 보면 되지요. 법화경엔 이솝우화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아요" -이렇게 수많은 경전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부처가 되는 길이지요. 한글대장경은 그 지름길이구요. 금강경에 보면 '이 경(經)에서 부처님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길을 벗어나 누구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경전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야지요" 역경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묻자 은사인 운허 스님과의 인연으로 이야기가 옮아갔다. 월운 스님이 머리를 깎은 건 1949년. 경기도 장단의 고향집을 떠나 남해 화방사에서 불경읽는 재미에 눌러앉았다가 출가했다. 월운 스님의 한문실력이 뛰어난 것을 본 화방사 스님들이 "봉선사에 운허라는 대학승이 있는데 그 스님한테 가라"고 해 운허 스님의 제자가 됐다. -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게 불교계의 현실입니다. 출가자로서 경학에만 매달려온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젊어선 동산 스님을 모시고 참선도 해봤지요. 그러나 참선수행자는 많은 반면 연구자는 적기 때문에 불교를 살리기 위해선 경학,역경을 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사교입선(捨敎入禪·교를 버리고 선에 들라는 뜻)이라고 하는 것도 무조건 교학을 버리고 멀리하라는 게 아닙니다. 가져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버릴 수 있나요. 교학을 보고 내용을 파악한 뒤 거기에 머물지 말고 실천수행의 길로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지난 4월 교종본찰인 봉선사 조실로 추대된 월운 스님은 "진정한 조실은 대중의 안목을 열어주고 세속의 물정도 훤히 꿰뚫어 볼줄 알아야 하는데 그저 나이가 많다고 추대됐을 뿐"이라며 "모두가 자기의 조실이 돼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공양을 위해 다경실을 나서던 월운 스님은 "밥은 해놨는데 얼마나 먹으러 올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완성된 한글대장경을 얼마나 봐줄지 걱정이 돼서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고 엉덩이가 짓물러도 멈추지 않는 일념,그야말로 역경삼매의 경지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