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풀이 되어 엎드렸다/풀이 되니까/하늘은 하늘대로/바람은 바람대로/햇살은 햇살대로/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풀' 전문) 김종해(60) 시인의 새 시집 '풀'(문학세계사)은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통해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한다. 지난 70년대말 김 시인의 대표적 시집 '항해일지'에 깔려 있던 절망적 현실 및 상황 인식을 극복한 건강함과 따스함이 돋보인다. '5천t의 선적위에 못질돼 있던 고뇌와 슬픔'이 지난 간 뒤 '사람사는 정(情)'이 넘친다. 그것은 복잡하고 난해한 내면의 탐색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진솔하면서도 견고한 서정으로 드러난다. 이순(耳順)을 맞은 시인의 작품은 어느 젊은 시인 못잖게 젊고 감각적이며 참신하다. 표제작 '풀'에 탈속(脫俗)한 청정세계을 향한 열망이 표출돼 있다면 시 '눈'은 여기에 아름답고 넉넉하며 따스한 시선을 포갠다. '눈은 가볍다/서로가 업고 있기 때문에/내리는 눈은 포근하다/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눈이 내릴 동안/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눈' 전문) 두 시에는 더럽고 너절하고 속된 것에 대한 거부가 공통적인 배색으로 깔려 있다. 타락한 현실에 저항하는 힘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여러편의 시에서 건강함과 원초적 생명력의 심벌인 어머니가 좌절과 절망속에 빠진 시인의 자아를 끌어올려 주고 있다. '오늘 아침 내가 띄운 봉함엽서에는/손으로 박아쓴 당신의 주소/당신의 하늘 끝자락에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길 없어도 그리움 찾아가는/내 사랑의 우편번호/…/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수신인의 이름을 또렷이 쓴다/어·머·니'('그녀의 우편번호' 중) 어머니는 시인이 '지상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그녀의 구원으로 인해 시인의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삶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죽음마저 결코 음산하거나 어둡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다. 그의 연륜을 짐작케하는 다음 두 시가 그 증거다. '지상의 시간이 끝난 사람이/잠자러 가는 시각,/인간의 이름은 모두 따뜻하다/이 별을 떠나기 전에/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별'전문)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그가 돌아가는 하늘이/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작아서 아름답다'('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전문)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