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신경숙(38)씨의 네 번째 장편 소설 '바이올렛'(문학동네)은 소외된 인간들의 '꺾인 욕망기(記)'다. 전작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외딴방' 등을 통해 사랑과 연민의 문제를 정갈한 문체로 다듬어 냈던 작가는 신작에서 특유의 풍성한 묘사로 부당한 운명을 견뎌낸 인물들을 그린다. 그들은 비록 '잊혀져도 무방할 정도로'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우리 내부의 심연으로 끊임없이 발신음을 보내와 상처입은 영혼들의 실존을 알려준다. 주인공 오산이는 아버지의 호명을 받지 못한 존재다. 엄마의 잇단 재혼으로 누구보다 많은 아버지가 있지만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녀를 사회에서 '잉여' 혹은 '결여'된 존재로 남게 했고 타인을 향해 쉬 손을 내밀지 못하도록 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지만 출판사 면접에서 낙방한다. 대신 얻은 자리는 세종문화회관옆 화원의 '꽃을 돌볼 여종업원'. 바이올렛을 찍으러 온 사진기자는 '아름다운 눈썹'을 가졌다는 말로 잠자던 그녀의 정염을 일깨운다. '물이 범람하듯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의식속으로 진입해버린 그 남자.그리고 허둥거리고 있는 그녀'(1백66쪽) 그러나 산이의 욕망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슬픔으로 전이되고 만다. 사진기자의 말은 무심히 내뱉어진 것이었고 그의 기억에서 그녀는 잊혀진 지 오래다. 산이의 절망감은 탐욕스런 꽃집 손님에게 겁탈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녀는 귓불이 붉어진 채 어둠속 화원안에서 길게 울지만 그 울음소리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산이는 그가 그리울 때 그의 회사가 바라다보이는 공터에 바이올렛을 꾹꾹 눌러 심는다. 하지만 그것마저 공사 중인 포클레인에 의해 파헤쳐진다. 보랏빛 제비꽃을 일컫는 바이올렛(violet)은 영어의 철자법상 폭력(violence)과 이웃하고 있으며 꽃의 유래도 희랍신화속 비련의 여인 '이오'에서 왔음에 작가는 주목한다.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남편에게 매맞는 셋집 주인 여자,사진기자의 '사랑해도 되겠소'란 무심한 말,화원손님의 겁탈 등은 모두 남성중심질서가 빚어낸 폭력의 양상들이다. 산이와 단짝인 남애와 수애도 '아버지 부재'의 상흔을 안고 있지만 그들 간의 강한 유대가 치유책이 될 수는 없다. 도심속에서 '섬'처럼 떠도는 산이는 일상에서 스쳐 지나치는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작가는 "누군가 내 소설속 하찮은 존재로 인해 고독한 현실속의 인간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고 바스러진 과거를 껴안게 되며 타인에게 한 발짝 다가가고 싶은 충동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작가로서 그보다 소망스러운 일은 없겠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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