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 「메멘토」가 8월 25일 우리나라에 상륙한다. 97년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필모그래피에 16㎜ 흑백영화 한편을 달랑 올려놓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나리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3년 뒤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완성돼 베니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지만 배급업자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올해 3월 미국 대륙을 통틀어 11개 극장에서 초라하게 간판을 올린 이 영화는 5월 들어 500여개 극장에서 상영되며 메이저 제작사와 배급사들에게 뼈아픈 후회를 안겼다. 전직 보험 조사관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아내가 강간 살해당한 충격으로 10분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빠진다. 그는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간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몸에 문신을 새기며 기억을 연장시킨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정체불명의 테디와 웨이트리스 나탈리는 끊임없이 사건의 단서를 암시하며 범인을 죽일 것을 주문하지만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 레너드는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늘 새로운 인물을 범인으로 여기고 살인 행각을 벌여나간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시간의 순서가 거꾸로 배치돼 있기 때문에 머리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첫 시퀀스는 사건의 결말이며 마지막 장면이 바로 영화의 시작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시퀀스의 첫 장면을 다음 시퀀스의 마지막 대목과 반복적으로 맞물려 놓아 114분의 러닝타임이 10여개의 뫼비우스 띠로 연결된 사슬을 이룬다. 컬러 시퀀스 사이에 끼어드는 흑백 장면은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하며 복선을 깔아둔다. 인간의 기억 창고에는 새로 일어난 일이 맨 위에 쌓이지만 이를 꺼낼 때는 순서에 맞도록 재구성해 오래된 일부터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러한 기억의 관습을 깨고 스스로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가까운 일부터 거슬러올라가는 것이 좋다. 단 등장인물의 얼굴에 난상처나 침대에 놓인 소품 하나하나가 기억을 되살릴 '메멘토(Memento:추억거리)'인만큼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단번에 이 퍼즐을 풀어낼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감독에게 조롱당한 기분을 참을 수 없어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장기상영하는 까닭도 관객들이 감독과의 두뇌게임에 승리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영화관을 찾기 때문이다. 제작사인 씨네월드도 이러한 특성을 감안해 이례적으로 인터넷 영화전문 사이트를 통해 초반 30여분을 5회에 걸쳐 공개하는 한편 두번째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할인 혜택을 주기로 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