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일시에 많은 사람이 밀려들면서 건설된 일종의 계획도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만주지방 부여(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온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무렵 마한의 서북쪽인 한강유역 땅 100리 가량을 얻어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이런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지난 97년 풍납토성 안쪽 동남쪽일대 대규모 재건축아파트 터를 발굴한 성과를 담아 최근에 펴낸 「풍납토성Ⅰ」 보고서를 통해 확연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경우 거의 똑같은 입지조건을 지닌 인근 경기 하남 미사리 및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과는 달리 신.구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단 1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풍납토성 일대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들어서면서 적갈색 무늬없는 토기를 사용하는 집단이 갑자기 등장해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한다.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에서도 지하 가장 밑바닥에서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이 남긴 것으로 주목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는 유적 곳곳에서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이런 사정은 1999년 이래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발굴이 있은 풍납토성 안쪽 한복판 경당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당지구 또한 청동기시대 이전 선사 유적과 유물은 거의 없고 적갈색무늬없는토기로 시작되는 유물층이 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 시기가 가장 빠른 적갈색무늬없는토기 출현 빈도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양이 적다면야 풍납토성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풍납토성에서 확인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의 양이 너무 많다. 따라서 연구소측은 풍납토성에 이 토기가 다량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정착촌 혹은 신도시 건설 같은 대변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으며 같은 충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미사리와 암사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4천년 무렵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을 비롯해 곳에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풍납토성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한성이 고구려군에 무너지는 서기 475년을 고비로 그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적과 유물 또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이 번성한 기간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한성도읍기(기원전 1세기 이래 475년까지)와 겹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연구소가 풍납토성을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 터로 지목하는 이유도 이런 증거들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