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55)씨의 새 장편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문학과 지성사)는 작가가 밝히듯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무상함, 즉 늙음과 그로 인해 상처받는 쓸쓸한 53세 중년 남자 한도린. 전직 연구소 실장인 그는 퇴직 후 번역일로 생계를 꾸려 간다. 아내와 별 문제없이 지내는 그는 연구소 시절 여직원이었던 정임과의 사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아 간다. 표제의 '끼끗한('구김살없이 깨끗하다'란 뜻) 들깨'는 정임(貞荏)의 한자 단어를 풀이한 것으로 그가 부르던 애칭이다. 우연한 기회에 15년만에 정임과 다시 만나지만 이미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이 아름다운 옛날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현실. 그는 결국 이같은 시간의 압제에 맞설수 있는 것은 '기억'임을 깨닫는다. 옛 사랑을 잊으려 애쓸 게 아니라 추억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살아 가자는 것. 기억의 위력 앞에서는 세월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주인공의 딸인 중학생 효민이 창작한 마법 이야기 '은자 왕국의 마지막 마법사'에서부터 암시된다. 일종의 액자소설로 들어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소녀 민이는 마법 수련을 위해 마법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란 말을 듣는다. 기억이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법성'이란 설명이다. 한때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해 논쟁을 야기한 주인공답게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사회와 문명에 대한 여러 가지 발언을 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매춘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거리의 여인들'을 기업가로 인정해 주자는 것. "거리의 여인들은 당신의 아내와 누이의 정절을 지켜 주는 사람들이다'란 서양 격언을 인용하며 한 등장인물이 역설하는 이 주장에 따르면 "매춘은 일부일처제 결혼제의 부족한 곳을 보완해 주는 사회적 기구'란 논리다. 이밖에 80년대 신군부를 단죄한 특별법의 소급입법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쟁과 결혼제도에 대한 학설들, 여러 사회병리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도 작가의 해박한 과학지식, 인문지식과 통찰력을 통해 전개된다. 96-97년 세계일보에 연재됐던 소설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성섭 기자 lee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