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거제도.한낮의 태양이 정수리에 따갑게 내리꽂힌다. 한점 습기없이 건조한 바람에 대지는 연신 마른 모래 먼지를 쿨럭거린다. 녹슨 가시 철조망안에는 남루한 옷을 걸친 사람들 2백여명이 줄지어 있다. 등짝에 "P.W"(Prisoner of War.전쟁포로)라 찍힌 이들은 불볕만큼이나 이글대는 눈동자로 철조망밖 무장군인들과 대치중이다. "카아아앗!" 어디선지 뱃심 좋은 목소리가 삼엄한 분위기를 가른다. 금방이라도 혈전이 벌어질듯한 포로수용소 풍경은 영화 "흑수선"의 촬영현장.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 지휘를 맡은 배창호 감독(48)이다. "흑수선"(각본 감독 배창호.제작 태원엔터테인먼트)은 한국전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간의 유혈참극을 기둥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의 슬픈 사랑을 그린 영화.배감독은 그런 영화를 "미스테리 액션 스릴러 로맨스"라 불렀다. "6.25가 진부한 소재일수 있지만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스펙터클한 장면을 펼쳐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정치나 이념을 넘어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슴아픈 사랑에 촛점을 맞추려고 해요. 운반수단이 미스테리 액션이지요. 우선 시.청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음 이야기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생각입니다" 거제시 지원으로 6천8백여평 부지에 지어진 포로수용소 세트를 중심배경으로 촬영중인 "흑수선"은 제작비 50억원에 안성기 이미연 이정재 정준호에 이르는 호화 진용을 갖춘 이른바 대형 블록버스터다. 80년대 "깊고 푸른밤""고래사냥"등을 만들며 최고 흥행감독으로 군림했고,90년대 "정"같은 완성도높은 저예산 예술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던 배감독으로서는 새로운 변신이며 도전이다. "한국의 스필버그라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때가 있었죠.그러다 스타 시스템이 지긋지긋해 서정적이고 따뜻함으로 충만한 영화에 마음이 갔어요. 내면을 더듬는 자화상을 그리고 싶은 기분이었달까. 그러다 또다시 대형벽화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4년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 드라마 구조나 감성적인 묘사는 내가 자신있고 화려한 액션은 무술감독이 잘 지도해주니 오히려 수월해요. 진부하지 않게,배창호 영화에 대해 실망없이,모자람없이 해야지" 오랜만에 충무로 주류 영화를 맡은 그는 "젊은 영화스탭들의 열정과 사기가 충천함을 느낀다"며 즐거워했다. "영화기술이 놀랄만큼 발전을 이뤘습디다. 특수분장이니 스턴트니 액션이니 과거와는 비교가 안돼.옛날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장면들을 구사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요. 소설가로 빗대자면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1백배 이상 늘어난 거죠.제작비 깎자는 제작자도 없고.처음 도전하는 장르니 연출하는 재미도 새로워요" 역량을 인정받는 중견 감독이 만든 블록버스터.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외화내빈을 극복하는 전범을 보여주었으면 하는게 충무로의 기대다. 하지만 그 기대는 되려 짐일 수 있다. 전쟁이라는 비극과 오락이라는 균형지점을 찾기가 어찌 쉬우랴.자칫 사랑놀음이나 화려함에 치우쳐 그 비극적 상처를 간과하진 않을지,블록버스터라는 그릇에 민족상잔을 보는 진지한 역사인식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역사에는 여러가지 접근이 있을 수 있지요. 극사실적일 수도 있고 완전히 픽션으로 갈 수도 있고.그 중간을 아우르면서 접점을 찾아 나갈것입니다. 재미에 흠뻑 빠지면서도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이 숙연한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예요" 그 결과물은 오는 11월 만날 수 있다. 거제=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