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서 가장 놓아두고 떠나기 아쉬운 것은 돈도,집도,자동차도 아닌,창 밖의 풍경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그 풍경들을 원없이 바라보는 여행의 축제를 꿈꾼다"

화가 황주리(44)씨의 에세이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생각의나무,8천5백원)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화가로서의 명성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만,그의 글에는 읽는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오묘한 힘이 담겨 있다.

그가 "이 세상의 흐린 날씨에도 매일 아침 날씨 좋은 하루를 꿈꾸는 당신에게 조금은 오래가는 즐거움이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순간,마음뿐만 아니라 바깥 풍경까지 금세 환해진다.

문체도 연록빛 빗물을 머금은 풀잎처럼 맑고 경쾌하다.

그는 출판사를 경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늘 원고지와 함께 살았다.

하루에 한장씩 원고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그는 나중 그것들을 한 캔버스에 이어 붙여 "추억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림의 대서사시,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삶의 총체성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삶의 무늬들이 책갈피마다 한 땀씩 수놓여져 있다.

행간을 읽다보면 "아무리 먹어도 낫지 않던 살구씨 냄새의 감기약 같은 그런 상처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화가의 내면이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쓸쓸한 가을날에는 우표를 그리워하고 아쉬운 봄날에는 "외로워 혼자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열에 들뜬 이마를 짚어주는 따뜻한 손"같은 사랑을 생각한다.

대여섯살 때부터 하루에 몇시간씩 그림을 그리던 꼬마 화가는 마흔 고개를 넘어와 지나온 길섶을 되돌아본다.

어느덧 "포도주를 마시듯,어릴적 말린 곶감을 아껴가며 아주 조금씩만 떼어먹듯,내 삶을 조금씩 조금씩 누려가는" 느림의 미학을 체득하는 나이.

그래서 여든번째 생일날 20대 초반의 남자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고 자살했다는 영화 "헤럴드와 모드"의 주인공같은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누군가와 고궁을 거닐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1년중 절반을 지내는 뉴욕 맨해튼의 거리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자신의 내부로 향한다.

"고흐가 지독한 난시였다는 걸 아세요? 그러니 중요한 건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지요.

누구나 다 대상을 통해 자기를 보는 법이니까요"

책제목은 르 푸아트벵이 죽기 직전에 했다는 말 "창문을 닫아주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에서 따온 것.

두세 페이지마다 실린 그림에서도 "부드러운 직선"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