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을 그림소재로 삼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뱀을 다룬 화가는 아마도 천경자씨가 아닌가 싶다.

''내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천씨가 1977년에 그린 작품이다.

뱀을 화관(花冠)처럼 머리에 이고 있다.

섬뜩하기까지 한 그림이다.

작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징그러운 뱀의 고정관념을 넘어 뱀에 대한 애착,뱀의 아름다움을 다함께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뱀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많은 뱀을 스케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색채를 얻음으로써 아름다운 뱀으로 바꿔 놓았다.

머리 위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형체는 짜릿한 긴장감마저 안겨준다.

천씨는 "그림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고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에요.한이 많아서 머리에 뭘 이고 그러는 거죠.근데 한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한을 풀고 고독을 이기기 위해 뱀을 그림소재로 삼았다는 뜻이다.

천씨는 부산피란시절(1952년) 국제 구락부에서 ''생태''를 포함한 28점의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이때 본격적으로 뱀그림을 선보였다.

천씨의 뱀과 개구리는 정평이 나 있는 그림이지만 돈을 받고 판 일은 없다.

천씨는 한이 많은 작가다.

엄격한 일부종사 개념이 남아있던 시대 두 낭군을 섬긴 일로 마음 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일까.

이 작품도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너무나 강한 화가다.

그림도 과작이어서 1년에 몇 점밖에 그리지 못한다.

그런데 몇 년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품을 모두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자식처럼 애인처럼 여기던 작품을 모두 내놓아 허전했던지 툴툴 털고 미국 딸네 집으로 가버렸다.

천씨는 인기작가다.

전시회를 열면 관람객이 가장 많은 작가(이중섭 박수근 김기창 장욱진 천경자) 5인방중 한 사람이다.

천씨의 인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림으로 고독을 이기고,한을 풀어낸 채색화가 천경자.

그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까.

월간 아트인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