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성치며 뻗대던 겨울도 꼬리를 내렸다.

마침내 봄이다.

주저주저 하던 봄바람이 아랫녘의 강줄기 산자락을 거슬러 북상중이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걸음걸음으로 스치는 자리마다 "꽃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불덩이를 감춘 수줍음의 동백을 틔웠고 어느새 매화나무 가지가지 새하얀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산수유꽃 노란물도 지리산 골짜기에 생명의 환희를 점점이 뿌리고 있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쏟아져 내리는 벚꽃이 봄의 기세에 악센트를 주면 진달래와 철쭉이 어김없이 화답할 터이다.

섬진강으로 내려간다.

봄, 꽃을 들이켜러 가는 길이다.

건너편 하동과 마주하는 광양쪽 섬진강변 861번 지방도의 섬진마을 일원.

땅기운이 내내 따뜻하다.

진안.장수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 광양만으로 빠지는 5백50리 유유한 섬진강 물길이 감싸고 있기 때문인가.

이상할 정도로 푸근하다.

푸른 물길도 차갑지 않다.

여기저기 드러난 모래사장이 튕겨내는 누런 햇살이 따뜻한 기운을 더해준다.

매화 때문인지 모르겠다.

"고격(高格)", "기품"이란 꽃말을 가진 매화가 진짜 봄의 시작을 선언하려 하고 있다.

백운산자락의 이 지역은 봄이면 매화가 지천으로 피어 별세계를 이룬다.

아직 양지녘 가지에만 꽃이 덮여 있지만 다음주 들어서면 고운 이불솜을 틀어 뿌려 놓은 듯 하얀 꽃구름을 보는 이들의 탄성이 이어질 것이다.

그 중심에 청매실농원이 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나무 집단재배를 시작한 곳이다.

5만여평 너른 땅이 온통 매화밭이다.

인근에도 매화나무가 많이 자라지만 청매실농원만큼 풍성한 데가 드물다.

세가지 매화꽃을 한몫에 볼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자랑.

푸른 기운이 도는 청매화, 붉은 빛이 감도는 홍매화, 그리고 하얗게 눈부신 백매화다.

홍쌍리씨의 집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광부생활로 돈을 번 홍씨의 시아버지 김오천씨가 농장을 시작했다.

그뒤 홍씨가 매화를 늘리고 종자도 개량, 매화나무와 매실에 관해 일가를 이루게 된 것.

정부지정 명인 14호인 홍씨는 매실박사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농원의 모습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재래장독.

2천여개의 장독이 농원 뒤편 왕대숲과 함께 분위기를 돋운다.

그 속에서 매실이 익고 있다.

매실원액, 매실농축액 등 숙성된 매실을 이용한 제품을 다양하게 개발, 판매하고 있다.

농원으로 오르는 길은 다소 어수선하다.

관광객을 맞기 위한 시설을 짓느라 시끄럽다.

오르내리는 승용차도 뒤엉킨다.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의 표정 만큼은 여유롭다.

농원 뒤편 산책로에 들어서야 그 여유로움이 다가온다.

하얀 매화와 그 향기 속의 오후.

수수하게 흐르는 농원 앞 섬진강 물길이 더욱 따사롭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