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 국토연구원장 >

1960∼70년대 우리나라 국토개발과 경제발전 목표는 ''국민총생산 극대화''와 ''수출제일''이었다.

그 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소득과 지역 격차는 GNP성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개발''의 의미가 새로이 조명되기 시작했고 ''근대화''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 말은 원래 아프리카 미개발국들의 근대화를 촉진시키자는 취지에서 나왔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채 유럽인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이식해 놓은 것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이처럼 ''개발''의 의미가 불분명한 채 회자되던 시절,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책이 한 권 있었다.

데니스 굴레가 1971년에 쓴 ''곤혹스러운 선택(The Cruel Choice)''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나라들이 개발의 과실을 얻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였지만 그 과실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곤혹스러웠다고 술회했다.

비록 한국 대만 그리스 이란 등이 미국 원조를 토대로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추진했지만 계층간 갈등과 부의 분배 등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 가치관 위에서 물질보다 선,갈등보다 화합을 중시하고 여기에 민주화된 정책결정 과정 등이 결합될 때 성숙한 사회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참다운 개발의 의미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개개인이 서로 존경받으며 창의성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고 규정짓는다.

덧붙여 ''어떤 종류의 개발이 인간적인 것인가'' ''어떻게 성취돼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해답은 오직 사회구성원들의 합의와 지혜로부터 얻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국토·경제개발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됐다.

인본주의 철학과 개발의 도덕성을 강조한 저자의 뜻이 내 삶과 일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국토연구원장의 직함에 걸맞게 우리 이웃 모두가 ''풍요롭고 인간다운 개발''의 과실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때로 본분을 잊거나 생각에 소홀해질 때 나를 깨우쳐 주고 일으켜 세우는 친구.나에게 인생과 공부의 큰 방향을 가르쳐준 이 책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행복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