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선 쓸쓸한 바람이 일었다.

담배를 피워무는 섬세한 손가락이나 간혹 으쓱해보이는 가느다란 어깨엔 떨칠수 없는 비감이 스쳤다.

이재한(29).영어명 존 H.리.국내에선 낯선 이름인 그가 장편 데뷔작 "컷 런스 딥"(The Cut Runs Deep.제작 알부스 필름.16일 개봉)의 상영을 앞두고 서울을 찾았다.

12세때 미국으로 이민한 교포 감독.15세때부터 단편영화를 찍었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숭배해 스콜세지가 다녔던 뉴욕대 영화학과에 입학했던,40여편의 단편영화와 여러편의 뮤직비디오로 재능을 인정받은 청년.그는 영화에 흐르는 깊은 우울만큼이나 가라앉은 빛깔을 내고 있었다.

"컷 런스 딥"은 뉴욕의 음습한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국계 갱단에 소속된 이민 2세들이 겪는 삶의 질곡을 담고있다.

한국계 혼혈아 벤(알렉스 매닝),갱단 두목으로 신비로운 슬픈 미소를 띤 제이디,고급 콜걸 미아..폭력과 섹스와 마약에 찌들어 살아가는 밑바닥 젊은이들의 상처와 좌절,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진지하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렸다.

감독은 "미국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로 좌절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보고 만났어요.

그런 의미에서 극중 인물들의 상처와 상실은 크게 보면 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라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소수민족""비주류"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들.미국에서 이민자인 그들은 한국에서는 교포로 또다시 분류된다.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기는 했지만 고통스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 양쪽 모두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는 영화가 "마이너"로서의 교포들의 삶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사는건 모두에게 고통같아요. 한국교포들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상처입은 자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말하고 싶었지요.

가족의 해체에서 오는 정신적 황폐함도 주된 관심사였구요.

배우들에게는 슬픈 장면에서 우는 대신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당부했어요.

정말 아플땐 눈물도 나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일까.

영화는 비극이지만 폭발하는 슬픔을 찾아볼 수는 없다.

아픔은 삼키고 슬픔은 안으로 가다듬어 걸러낸 고통이 주조다.

재즈와 테크노를 아우르는 음악은 절제된 비장미를 더욱 끌어올린다.

그 신선한 감성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올해 이탈리아 살레모 영화제와 뉴욕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았다.

"실제로 데이비드 매기니스(제이디역)는 독일과 한국 혼혈이고 알렉 매닝(벤역)은 아일랜드와 일본 혼혈인데 제가 의도한 감성과 잘 어울렸어요.

한국관객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그는 지난 가을 쉬는 틈을 타 소녀가수 "보아" 인디밴드 "더 링" 박정현,부활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했다.

내년초엔 영국 그룹 리알토의 뮤직비디오도 찍는다.

"앞으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엔 행복에 관심을 돌릴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같다"며 조용히 웃었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