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캔버스에 유채,80x60 cm)은 남관(1911-1990)화백이 1978년 파리에서 그린 작품이다.

옛날 임금님이 썼던 왕관 모양을 연상케하는 추상화.

구축적 형식을 보이고 있지만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얼른 보기엔 하나의 그림이지만 작품 구성은 다원적으로 돼 있다.

그림의 큰 형상안에는 여러 작은 형상이 낱낱이 모아져 하나를 이룬다.

이 형상들은 모두 환상적인 인간상들이다.

상형문자 처럼 그려져 있고 주술적인 성격도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의 명제를 ''묵상''이라고 했을까?

남화백은 현실이라는 바탕위에서 세상 사람들이 풀기 어려운 여러가지 문제들을 묵상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평론가 임영방씨는 묵상 의 작의는 희로애락이라는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과 그 역사가 결국 허무하다는 작가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알려 주는것 이라고 말했다.

묵상은 다른 작업에 비해 다채스럽고 경쾌한 맛이 난다.

그러나 단색조의 바탕과 지배색의 선호 경향은 여전히 작가의 특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남관 화백은 1950년대 중반에 파리에 닻을 내리고 살롱 드 메를 통해 파리 화단에 데뷔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현대미술의 대가인 아르통,마네시에 자오우키,알레친스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파리의 1급 화랑인 플뢰브 갤러리에 초대받아 국제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았다.

이후 남관 화백은 1966년에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따내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때 현대미술의 거장 폴리아코프 타피에스가 명예상에 머물러 그의 대상은 더욱 빛났다.

남화백은 화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인간으로서는 많은 풍상을 겪은 사람이다.

깐깐한 성격 때문에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해 고립되기도 했다.

파리에서 1968년 8월 16일에 돌아와 처음 국전심사에 참여한 그는 제 17회 국전의 서양화분과 심사 위원장을 맡았다.

분과별 심사위원장 7명이 대통령상,국회의장상,국무총리상을 투표로 결정하는 데 남관(서양화),백태호(공예)를 제외한 5표가 약속이나 한 듯 서예,조각,동양화로 몰렸다.

이때 남관 화백이 입상작 선정 투표가 사전 단합에 의한 돌려 먹기식이라며 심사 도중에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심사장을 퇴장해버렸다.

1986년에 일어난 "남관그림 국제사기사건"도 결과적으로는 그의 자존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남화백은 무역업자의 꾐에 빠져 세계적인 미술관인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영국이 자랑으로 여기는 헨리 무어와 교환으로 전시회를 연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테이트 갤러리 전시회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존심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실행하다 사기에 걸려들었다.

남화백은 1983년 제 28회 예술원상 후보에 올랐지만 예술원이 요청한 주민등록등본과 신원증명서 제출에 응하지 않았다.

사실상 거부를 한 셈이다.

하지만 예술원은 1990년에 작고 작가에게는 주지 않는 관례를 깨뜨리고 제 35회 예술원상을 그에게 주는 기록을 남겼다.

월간 art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