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백권 돌파 기념 시선집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됐다.

시인 신경림씨가 엮은 이번 시집에는 1975년부터 2000년까지 25년간 창작과비평사에서 작품집을 낸 시인 등 88명의 시가 담겨 있다.

창비시선은 시집의 상업출판시대를 연 기획물.1975년 창비시선 1호로 신경림의 농무가 나오기 전까지 상업출판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인세를 받고 시집을 내는 경우는 청록파시인 등으로 제한됐다.

신씨의 농무도 본디 자비로 5백부 찍은 것을 나중에 증보한 것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약장사 기타소리에 발장단 치다보면/왜 그렇게 서울이 자꾸만 그리워지나''(신경림의 파장 중)

창비시선은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사회성 짙은 작품을 싣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는 영예와 고통을 체험했다.

시인들은 시와 함께 실천을 고민했고 독자들은 핏물 배인 행간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읽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이성부의 봄 중)

시인은 사회적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이라는 마야코프스키적 주장과 시인은 열정 자체가 아니라 열정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는 니체적 발상이 충돌하던 시기.

신씨는 확신과 회의가 교차하던 한국시의 일대 경관을 초기시선이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누런 베수건 거머쥐고/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들 닦으며/아,하루나 이틀/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강은교의 풀잎 중)

이번 시집에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곽재구의 ''사평역에서'',정희성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김용택의 ''섬진강'' 등 ''간판급'' 창비시인들의 대표작이 실려있다.

편집자인 신경림씨는 작금의 시(詩)위기론과 관련,"청(淸)대 비평가인 기윤은 두보를 가리켜 시가 소박하면서도 진실하여 꾸며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며 "시정신과 시법의 조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