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고원정씨의 신작 장편 ''한국인''(해냄·전2권)이 출간됐다.

세기말 한국지성계의 화두였던 민족주의 논쟁을 소설로 풀어낸 묵직한 작품이다.

고씨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제시한다.

개성 있는 인물,속도감 있는 문장,볼륨 있는 구성.음모와 배신이 곳곳에 숨어있는 이 작품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를 매혹한다.

IMF 이후 학계는 동아시아적 가치의 존재 유무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란 주장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소설가인 고씨는 비유와 상징으로 이뤄진 허구적 세계를 통해 논쟁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다.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를 이만큼 깊이있게 문학적으로 천착한 작품도 드물다.

주인공 이일도는 우리얼되찾기운동 본부 회장이다.

미국 IE그룹에 인수된 대산전자 노사분규 현장에서 백인 테러리스트에 의해 한국인 노동자가 희생되자 전국은 반미 물결에 휩싸인다.

이씨는 민족주의운동 선봉에 서서 제2의 3·1운동을 꿈꾼다.

한편 이씨의 딸 이재라는 아버지의 반대편에 서서 ''국경없는 세계''운동을 펼친다.

이재라는 국제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친다.

주한미군기지가 습격당하는 등 민족주의운동이 강경해지자 미국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백악관 인권담당 특별보좌관 조나단 리를 급파한다.

한국계 미국인인 조나단은 아버지 이름이 이일도와 같다는 데 의문을 품는다.

이일도라는 이름의 두 사나이.

소설은 ''제2의 김구''라 불리는 이일도의 어두운 과거를 파헤친다.

원래 이일도의 카리스마는 독립투사인 아버지 이세건의 후광에 힙입은 것이었다.

이일도가 이세건의 아들이 아니라 일본인 가네모토의 자식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일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민족주의의 태생적 한계를 우회적으로 지적하면서도 세계주의의 함정을 경계한다.

민족주의가 구심력이라면 세계주의는 원심력.

두 가지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 사회가 추락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를 중심에 놓는 평면적 세계관을 버리고 중앙과 주변이 따로 없는 지구본의 세계관을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소설 말미에서 작가는 ''21세기 선비''라는 이재륜에게 ''뿌리와 날개''라는 단체를 발족하도록 한다.

민족주의가 뿌리라면 세계주의는 날개다.

굳건한 다리로 버티고 서서 웅비의 나래를 펴자는 주장이다.

고씨는 민족적 명예와 자존심을 먼저 배려하는 정신적 세계화를 강조한다.

1985년 아프리카 가상국 장군의 죽음을 통해 독재자의 말로를 그려낸 단편소설 ''거인의 잠''으로 등단한 고씨는 단편집 ''칼한자루의 사상'' 대하소설 ''빙벽'' 등을 상재했다.

장편 ''최후의 계엄령''은 1992년 대선정국을 정확히 예견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