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집 근처에 홍유릉이 있습니다.

매일 산책하는데 하루는 소나무와 때죽나무 한쌍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거친 소나무와 고운 때죽나무가 한데 엉겨있는 모습이 포옹하는 남녀 같았습니다.

문득 땅밑으로 얽혀있을 그들의 뿌리가 머리속에 떠올랐죠"

소설가 이승우(41)씨의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문학동네)은 조용히 서있는 식물 내면 깊숙이 감춰진 욕망의 뜨거움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에 따르면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무수히 피고지는 욕망의 꽃.

견딤의 자세로 풍경이 돼버린 나무는 그 자체로 성스럽다.

작가는 나무의 은밀하고 끈질긴 단 하나의 욕망이야말로 생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의지라고 말한다.

"사연이 없는 나무가 있을까요.

요정 다프네는 자신을 쫓아오는 아폴론을 피해 월계수가 됐습니다.

오해로 죽어간 여인이 변해서 된 것이 편도나무지요.

나무는 깨어진 사랑의 꿈입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 이야기를 겹으로 펼쳐내는 이 소설은 하나의 피아노를 둘이 연주하는 연탄곡과 비슷하다.

주인공 ''나''는 형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는 청년.형의 애인 순미를 사랑하던 나는 어느날 질투심에 못이겨 형의 사진기를 내다판다.

사진기 속에 들어있던 필름이 문제가 돼 형은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군대에 가서 부상으로 두 다리를 잃는다.

가정은 파탄나고 형은 광란상태에 빠진다.

"식물인간 같은 아들의 동물적인 욕구를 위해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유곽으로 갑니다.

처절한 풍경이죠.

그들은 결국 ''남천''이라는 공간에 이르러 구원을 받습니다"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이 숨쉬는 남천에서 그들은 화해와 공존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작가는 남천을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존재하는 공간,마음속이든 우주속이든 어딘가 있어야만 하는 신화적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1980년대 이념과 종교의 긴장 속에서 욕망과 죄의식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했던 이승우씨.

그는 새 소설에서 다소 통속적인 주제를 신화적 세계와 접목시켰다.

글은 감각적으로 쓰더라도 문제의식은 분명해야 한다는 주장.

이제 현실적인 삶속에서 소설의 문장을 구하려고 한다고 이씨는 말한다.

"앞으로는 죽음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작가는 그때 그때 가장 절실한 것을 쓰게 마련이지만 존재론에 대한 고민이 제 소설의 뿌리로 남을 것입니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기독교적 이성주의''에 기초한 문학세계를 일구어왔다.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등.

1993년작 ''생의 이면''은 최근 불어로 출판돼 르몽드지 문학면 톱기사로 소개될 만큼 호평받았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