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4박5일 일정으로 처음 찾은 일본은 예상외로 한가해 보였다.

우리의 추석에 해당되는 오봉절 연휴에도 불구하고 간사이(關西)공항에서 아스카(飛鳥)에 이르는 길은 그리 막히지 않았다.

나라현(奈良縣) 가시하라에 있는 곤충박물관과 아스카의 다카마쓰즈카(高松塚)를 본 뒤 짐을 풀기 위해 오후 늦게 문을 두드린 요시노(吉野)산의 산사는 적막하기까지 했다.

조상의 혼령이 다니러 오는 길을 밝히기 위한 것이란 작은 불꽃놀이만이 이국의 명절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상점 간판의 글씨와 가옥의 형태를 빼면 좀 더 잘 닦인 우리의 소도시와 다름없었다.

아스카는 일본 고대사의 본고장.

4~5세기부터 백제와 신라인들이 무리지어 건너와 선진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일본 최초로 국가형태를 갖춘 야마토(大和.지금의 나라) 조정의 수도권 지역으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정치세력 다툼 및 한반도와의 대외관계가 활발히 이뤄졌다.

지형적으로는 부여를 빼닮았다고 한다.

아스카에서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다카마쓰즈카.

지난 72년 발굴된 전방후원(前方後圓)식 고분이다.

일본이 "전후 최대의 발견"이라며 흥분했던 이 고분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벽화속 인물과 옷차림이 쌍영총, 무용총, 수산리고분벽화와 같은 계통이라는 것.

답사단과 함께 한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남주작(南朱雀)을 제외한 사신도와 별자리그림이 그려진 것도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양식과 같다"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고구려인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아스카역사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고분의 벽화는 누구나 한반도 전래를 수긍할 만큼 눈에 익었다.

특히 거대한 돌로 이뤄진 이시부타이(石舞台) 고분에선 백제계 세력의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고분의 피장자는 아스카왕조의 정치실권을 장악했던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가씨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위례성을 빼앗기는 등 고전하던 당시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했던 목리만치의 후손.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던 쇼토쿠 태자와 손잡고 정치세력을 평정하며 불교를 공인케한 인물이다.

일본 최고의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는 그가 세웠다고 한다.

가람배치 등 설계는 고구려양식을 받아들였다.

고구려에선 아스카사 건립 때 황금 3백량을 보내왔다는 기록도 있다.

주지도 백제승인 혜총과 고구려승 혜자였다.

특히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다.

야마모토 주지는 "금당엔 백제에서 보낸 금동대불을 안치했고 탑에도 백제에서 보낸 불사리를 모셨으며 지붕은 백제기와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선 일본의 국보 1호를 볼 수 있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시공을 초월한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라고 예찬한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우리나라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상과 너무 닮았다.

아닌게 아니라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한 학생의 실수로 잘린 손가락을 보수하려다 재질이 적송인 것을 알게 됐는데 적송은 당시 한반도엔 흔했으나 일본에는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

일본서기에도 신라에서 보낸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국보 1호이기 때문인가.

경내 표석에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을 적시한 듯한 글자가 하얗게 지워져 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