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실무팀의 최대 고민은 북의 대표로 누가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구체적인 일정이나 의제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평양측은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국가정보원 비밀 채널을 통해 평양으로부터 한통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궁중요리를 먹어볼 수 있겠는가"

청와대는 이런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했고 이때부터 정상회담 준비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방북 1주일 전인 6월6일.

청와대 집무실에는 퍼머 머리에 금테안경을 낀 50대 초반의 사나이가 김대중 대통령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의 역할은 김정일 위원장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실물 모델을 대상으로 모의 남북정상회담 리허설까지 가졌다.

이같은 막후비사를 최초로 밝힌 ''남북정상회담 600일''(최원기·정창현 지음,김영사,9천9백원)이 11일 출간된다.

이 책에는 지난 98년 11월28일 베이징에서 시작된 첫 비밀접촉부터 역사적인 남북정상의 합의문 발표까지 회담의 전과정에 얽힌 미공개 일화가 담겨 있다.

한반도와 미·일·중·러의 움직임,향후 남북관계에 관한 큰 그림도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국제정치의 복잡한 역학구도와 북한에 대한 이해,통일시대의 청사진을 색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정상회담을 전후한 서울·도쿄·워싱턴 라인과 평양·베이징·모스크바 라인의 숨가쁜 교차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은 남북정상회담 타결 소식을 미국에 빨리 알려주지 않았다.

베를린 선언 때도 그랬다.

미국은 ''상대방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우방간의 원칙''이라며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고 정상회담 설명차 워싱턴을 방문한 고위급 인사에게 ''갓뎀''이라는 상소리를 하기도 했다.

대북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미국이 조수석에 안게 된 것이다.

워싱턴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 대통령이 취임 25일밖에 안된 일본의 모리 총리를 서울로 불러들인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전방위 외교의 극적인 연출이라 할 수 있다.

평양에 대한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구애작전이 시작된 것 또한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해방 이후 가장 오랫동안 색깔 시비에 시달렸으면서도 평양행의 꿈을 버리지 않은 ''지독한 인물'' 김대중 대통령과 긴 세월의 ''은둔''에서 해방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30년 넘게 구상해온 DJ통일론의 결정체와 그간의 여정,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김정일 위원장의 퍼스낼리티가 상세히 분석돼 있다.

무대 뒤에서 역사적인 대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가슴 졸인 조연들의 애환도 묻어있다.

2박3일간의 정상회담을 생생하게 재구성하고 남북간 물밑 접촉,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관계,국내외 평가 등을 균형적인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여주는 종합 리포트라 할 수 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