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했지요.

그분에게도 "뜻"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보다 희망이 더 컸지요.

장정 서너명 분의 인쇄물을 혼자 배달하던 시절.

한양대 건축학과 사무실이 있는 언덕길을 힘든 줄로 모르고 올라가던 추억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 땐 학교앞 시내버스 정류장에 책과 카타로그를 내려놓고 몇번씩 어깨 짐으로 져다 날랐다고 합니다.

택시를 탔다가는 그나마 쥐꼬리만한 이문도 날라가버리니까요.

헉헉대며 올라갔다가 부리나케 뛰어내려와야 했지요.

땀에 젖은 속옷이 말라 소금 소리를 내거나 신발이 미끄러지는 것도 모르고 말예요.

정류장에 부려놓은 책을 누군가 들고 가버릴까 조마조마했지요.

몇년전 딸 아이의 메모 한장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그분도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일했지요.

밤중에 파김치가 돼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문에 쪽지가 하나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아빠,아무리 늦더라도 꼭 저를 깨워주세요"

미술대회에서 받은 상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아빠 얼굴을 볼 수 없어 새벽에라도 깨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졌으니 오죽하겠습니까.

98년 몰아닥친 IMF한파는 그에게 뼈가 시릴 정도의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연쇄부도의 회오리에 말려 그도 무너지고 말았던 겁니다.

지방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그는 평범한 청년이었지요.

부임 다음해에 시인이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심사로 "심상" 신인상에 당선된 뒤 서울로 올라와 야간대학에 편입하고 시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여러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인쇄밥"을 먹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지요.

"환경과 조경"이라는 잡지사를 끝으로 그는 퇴직금 5백만원을 뭉쳐 안국동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네평 공간의 반을 갈라 쓰자니 그야말로 발뻗을 자리도 없었지만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지요.

출판사 이름은 "둥지"라고 지었습니다.

올림픽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던 88년이었지요.

그의 첫꿈은 시집출판이었습니다.

첫 작품으로 명시선 "푸른 그리움과 첫사랑 설레임으로"를 냈는데 아,이게 4만부나 팔리지 뭡니까.

그러던 어느날 윤재근 한양대 교수의 2천8백장짜리 "시론"원고를 받아 혼신의 힘으로 책을 냈고 이 때의 신뢰 덕분에 윤재근 교수의 장자 철학우화 시리즈를 펴냈지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등 세권이 밀리언셀러의 "기적"을 안겨줬습니다.

이듬해 펴낸 "세상을 보는 지혜"는 연속 1백13주나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지요.

이 때 광고문안이 "소중한 사람의 인생 앞에 놓아두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이 한마디가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으니 시인의 감성은 이럴 때 빛을 발하는가 봅니다.

이문열씨와 조성기씨의 작품으로 문학 분야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그는 95년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로 교육사업에 나섭니다.

교사나 출판인이나 모두 교육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매우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97년에는 일본에 영어교재 시리즈를 수출하기까지 했지요.

그렇지만 출판사가 송두리째 날아가고 수출대금도 은행으로 들어가버렸지요.

그럴 때의 억장 무너지는 심정이야 말로 다할 수 없겠지만 제게는 그분이 다시 일어서는 장면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부도난 회사 사장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기 십상이지만 그는 주변으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회사는 잃었지만 사람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나온 "마지막 라운드"를 기억하시는지요.

말기암 선고를 받은 시한부의 아버지와 골프여행을 떠난 아들 이야기 말입니다.

슬픔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이 책이 그분에게는 재기의 "첫 라운드"였습니다.

삶이란 때때로 절망의 늪에서 극적인 굿샷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멋진 게임이기도 하지요.

며칠전 그분을 다시 만났는데 부도 이후의 곤궁함에 대해서는 극구 말을 아꼈습니다.

"마지막 라운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팔순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모의 기쁨과 슬픔은 비밀이다.

기쁨은 굳이 말하지 않고,슬픔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지요.

"같은 샷을 두번 할 기회는 없다"는 섭리와 함께 "인생은 우리에게 슬픔을 약속하지만 기쁨을 만드는 건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도 전해줍니다.

이 책은 7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그분이 최근에 펴낸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도 3판까지 매진됐다는 소식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황근식입니다.

옛 "둥지"위에 새로 앉힌 출판사 이름은 "아침나라"이구요.

참 상큼하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 맑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의 아침나라에 새로운 풀꽃이 파릇파릇 솟는 모습을 생각하면 저도 덩달아 마음이 푸르러집니다.

<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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