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 로맨스 중의 하나는 화가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사랑이다.

가난한 유태계 이탈리아 화가는 카페에서 데생을 팔아 술을 마시다 서른 셋에 폐렴으로 죽었다.

임신 중이었던 에뷔테른은 남편을 따라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피카소의 애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화가와 헤어진 뒤 그녀는 피카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회고록으로 큰 돈을 벌었다.

2편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에 피카소는 부랴부랴 돈을 들고 여자를 찾아갔다.

덕분에 원고는 30년간 서랍 속에서 잠을 잤다.

사랑의 두 가지 모습.

시인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연인 마리 로랑생도 떠났다고 슬퍼했지만 마리 로랑생은 자작시 "진정제"에 "버려진 여자보다 가여운 것은 쫓겨난 여자"라고 적었다.

희생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어쨌든 모두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즉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다.

"랭보 만세,라포르그 꺼져라"를 외치며 난투극을 벌여도 풍기문란으로 잡혀가지 않았던 시대.

20세기 새로운 예술에 대한 고뇌가 무정부주의 폭거로 나타나도 외려 박수가 쏟아지던 때.

실화소설 "보엠"(단 프랑크 저,박철화 역,이끌리오,전3권,각권)는 지금부터 1백년전 파리에 살던 예술가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피카소와 그 일당들"의 이야기는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신변잡기 모음이 아니다.

모딜리아니 아폴리네르 수틴 샤갈...

작가는 파리를 예술의 심장으로 만든 외국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에콜 드 파리(school of paris)의 좌장은 피카소다.

그의 오른팔은 시인 막스 자콥에서 아폴리네르로,다시 장 콕토로 바뀐다.

유일한 맞수는 야수파의 거두 앙리 마티스 뿐이다.

피카소냐 마티스냐는 오랜 논쟁거리다.

피카소는 공인된 천재지만 마티스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Bonneur de la vie)"을 한 번이라도 본 관객은 그를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장의 그림은 1천편의 시보다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피카소에게 빛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본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대로 그렸다.

피카소에 관한 일화 하나.

헤밍웨이의 "대모"였던 미국 여성작가 거투르드 스타인은 피카소 작품 수집가였다.

파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아니 저 그림은 거투르드를 조금도 닮지 않았잖아"

"상관없어.거투르드가 그림을 닮게 될 테니".

독불장군 피카소도 젊은 시절엔 가난했다.

친구였던 시인 막스 자콥은 변장을 하고 화랑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피카소의 그림이 없다구요. 아직도 그렇게 재능있는 청년을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

막스 자콥은 순전히 피카소를 먹여살리기 위해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다.

1906년 피카소는 마티스에 대적하기 위해 내놓은 "아비뇽의 처녀들"이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자 절망했다.

아폴리네르조차 침묵했다.

5명의 창녀를 모델로 한 "아비뇽"은 14년 뒤인 1920년에야 팔렸고 1927년 일반에 공개됐다.

혁명은 그토록 더뎠다.

이 책에는 블레즈 샹드라르,피에르 르베르디,앙드레 브르통,마르셀 뒤샹 등 전설적인 예술가의 뒷이야기가 담겼다.

초현실주의 전사였던 르베르디가 1920년대 이후 수도원에 칩거했음은 특이하다.

에콜 드 파리의 여왕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모델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화가 마리 로랑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