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풍락산 자락에 손수 흙집을 짓고 사는 "막돌" 정호경 신부가 불경에 이어 장자와 우파니샤드 읽기(햇빛출판사)를 잇따라 펴냈다.

반야심경에서 성경으로,다시 장자에서 우파니샤드로 이어지는 지적 편력은 카톨릭신부의 "살림"철학을 대변한다.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수 없는 법이다. 마루바닥 패인 자리에 한잔 물을 부으면 작은 검불은 뜰수 있으나 물잔을 놓으면 바닥에 닿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깊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 수 없다. 그러므로 솟구쳐 9만리를 올라야 바람이 깊어진다"(장자,소요유 편)

정 신부는 청년시절 장자 문고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장자를 좋아했다.

1968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고려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때는 장자를 주제로 논문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는 70~80년대 카톨릭 농민회 지도신부로 노동사목을 펼치는 동안 이현주 목사,아동문학가 권정생씨 등과 "장자모임"을 가졌다.

두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성경과 장자는 놓지 않았다.

장자를 즐겨 읽는 까닭은 노자가 딱딱한 철학인 반면 장자는 부드러운 문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자의 "도"를 하느님으로 바꿔 읽어보자.

"참 주재자가 존재하는 그를 온전히 알 수 없고 그 하시는 일이 뚜렷하나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그는 존재하지만 그 모양은 없는 것이다"(제물론 편)

여기서 그는 곧 도이니 "만물은 본래 이루고 깨어지는 것이 없고 늘 하나일 뿐"이라고 할 때 그 "하나"이다.

불교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왔구나 왔구나 깨달음의 이 언덕을 다함께 왔구나. 더불어 훨훨 날게 되었구나. 새 부처님들 만세 얼씨구 좋다"로 번역했던 카톨릭신부는 독특한 방법으로 장자를 읽어내려간다.

우파니샤드는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람이 사실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는 사람이 사실은 하느님을 모르느니 하느님을 안다는 사람에겐 하느님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시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이다"(케나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의 하느님은 초월자 아트만이지만 신앙의 자세는 기독교와 통한다.

육신은 수레이니 지혜는 마부이고 마음은 고삐라고 가르치는 힌두교.

수레의 주인은 결국 신이다.

윤승아 기자 a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