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84)화백.

그는 한때 국내화단에서 대들보같은 존재였다.

1930년대 동경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한 그는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우리나라에 추상미술을 처음 전파했으며 50년대에는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60년대 한국미협이사장으로 있을때는 우리미술계 발전을 위해 행정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부럽지않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그가 1965년 상파울루 국제전 커미셔너 겸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가 돌연 잠적해버린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로운 신화"를 찾아 떠난 이유를 김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작가는 감투를 쓰면 작품활동에 지장을 받습니다.

감투를 훌훌 벗고 그림에만 전념하고 싶어 한국을 떠났지요"

그후 뉴욕화단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다듬어온 김씨.

그가 오는 20일부터 5월14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지난 50년간의 그림인생을 총정리하는 회고전을 갖는다.

1986년 첫 귀국전을 가진이후 5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생동적인 붓질로 자연적 이미지를 최소한으로 표현한 1960년대작 "유연견남산"을 비롯 1972년의 "꽃핀 능금나무",새로운 조국체험을 화면에 구현시킨 1980년대의 "경주의 나무""인와재색"등이 나온다.

또 조국애와 한국미의 정신적 열애를 담은 1990년대작 "토기의 정물""붉은 꽃"등 모두 75점이 출품된다.

출품작 대부분이 미국에서 생활하며 그린 것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영향을 거침없이 내보이면서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원시림 사이에 뚫린 고속도로 처럼 그의 풍경속에는 직선이 달린다.

자를 대고 그은 듯한 이 직선은 화면을 긴장하게 만든다.

이러한 화면분위기는 물질문명이 극에 달한 뉴욕생활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조국산하를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특히 북한산은 그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북한산을 볼 때마다 세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장엄한 리듬을 느낍니다.

일제 때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명동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졌지요"

한국전쟁 때는 아들의 시체를 안은 어머니의 연민같이 처량했으며 지금은 빌딩숲을 끌어안은 신기루처럼 느껴진다고 술회한다.

"내 작품에서 완성이란 없다.

다만 당시의 정신상태를 기록하는 과정일뿐"이라고 강조하는 김씨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오늘도 정신세계를 화폭에 기록하고 있다.

김씨의 가계는 미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선친인 김찬형은 고희동,김관호와 더불어 도쿄 미술대에 유학한후 한국에 서양화를 도입한 선구자였다.

두자녀는 작가로 활동중이다.

(02)3216-1020

< 윤기설 기자 upyks@k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