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엔 어딘가 향수가 배어있다.

추억의 여로를 연상시키는 지난날의 유물이라는 뜻에서 만이 아니다.

그 유량한 음향속엔 구식 기차를 타 본 일이 없는 신세대에게도 무언가
그리움의 요소가 있다.

기차가 달리는 장면에 설경까지 나온다면 그 낭만적 아름다움은 더할 나위
없다.

많은 영화팬들은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시베리아 열차의 설원 질주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영화 "철도원"도 눈덮인 철길을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매우 환상적으로
그려놨다.

눈밭을 헤쳐가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왠지 구슬프게 들린다.

이용객이 줄어 곧 폐쇄될 처지의 노선인 데다가 열차가 한 량뿐이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주인공은 바로 종착역인 호로마이역의 유일한 역무원이자 역장.

그는 평생을 기차와 함께 살다가 정년을 맞게된 홀아비다.

기차.기적.눈이 연결된 스토리는 대개 짐작할만 하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거나 애잔한 회상의 과거사가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철도원"도 그 예외가 아니다.

외롭게 시골역을 지키는 한 역장이 겪는 인생유전이 매우 슬픈 색깔로
그려져 있다.

직무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아내와 자식의 병간호도 제대로 못해 가족을
모두 잃은 처지에 평생의 둥지였던 역사에서도 멀잖아 떠나야 할 입장이다.

그는 새 직장을 마다하고 마지막 열차가 당도하는 날 눈덮인 철길에 몸을
눕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슬프고 서정적으로 이끌어가지만 매우 섬뜩한 일면도
있다.

평생을 한 직종에 매달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일본인 특유의 근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거의 없는 빈 열차인데도 올 때나 떠날 때나 신호를 보내는
주인공의 동작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그런 고지식함 때문에 그는 홀몸신세가 됐지만 처자를 돌보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은 느낄 지언정 결코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철도원으로서 맡겨진 임무가 다하는 날, 허무감속에 저승길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진주만을 자폭 기습한 카미카제의 맹목성과 28년간 밀림에
숨어 항복을 거부했다는 어느 패잔병의 오기와 다를 것이 없어 정나미가
떨어진다.

일벌레 역장은 오늘날 일본의 번영을 이끈 산업전사의 한 표상처럼 보인다.

직분에 투철하며 한 우물을 파는 장인정신이 그것이다.

그의 정년은 구세대의 퇴장을 의미하며 그의 죽음은 직업인으로서의 용도
폐기를 뜻한다.

그가 분신처럼 아끼던 증기기관차시대의 용품들이 이젠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신세가 된 것처럼...

그가 노추로 여겼을 법한 "구차한 연명"을 포기한 막판의 결단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노후의 안락을 저버린 그의 융통성 없음마저 아름답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