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1990년대 문학시장을 지배한 "영웅"이다.

그동안 소설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디지털시대를 맞아 소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현재 전개되는 디지털혁명 속에서 전자책(e-books)이 등장하면서 산업혁명의
산물인 소설이 점차 존립근거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소비사회의 문화상품인 소설은 철두철미하게 근대적인 장르다.

소설이 오늘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은 18세기 이후 일이다.

고대.중세를 거쳐 맹위를 떨친 것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시)이었다.

중세때처럼 시가 복권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21세기 벽두에 중견 문학평론가 3명이 소설의 미래에 관해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문학평론가 신철하(세명대 교수)씨는 계간지 "라 쁠륨" 2000년 봄호에서
"시장과 타협한 작가들이 소설을 타락시켰다"며 "소수독자를 겨냥해 내면화의
길을 걸어온 시가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씨의 평론 "미래는 없다-우리 소설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론"은
"신변잡기에 가까운 불량한 서사들이 대중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한다.

신씨는 "우리시대 글쓰기가 손가락 끝에서 이뤄지는 테크닉으로 전락했다"며
"소설의 전면적인 비극이 이미 예고됐다"고 강조한다.

문학은 소통 이상의 인간적 발의를 함축한다고 신씨는 지적한다.

철학 부재와 문체 빈곤으로 점철된 1990년대 소설에선 이같은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인간학으로서 문학은 영원한 수작업이므로 디지털 시대에도 치열한 작가
의식을 관철시켜나가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 교수)씨는 새로운 문학의 특징을 "3F-Female
(여성), Feeling(감정), Fantasy(환상)"로 요약한다.

세가지 경향을 아우르는 것은 디지털적인 욕망이며 그 욕망의 핵심은
속도이다.

김씨는 같은 책에 실린 "디지털 욕망의 앞날"에서 1990년대 이미 3F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20세기는 1989년에 끝났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상기할때 21세기 문학이
1990년대 벌써 시작됐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김씨는 이인성 최윤 정찬 최인석 백민석 정영문씨 등 독자적인 상상력을
일구는 작가들을 주목해야한다고 덧붙인다.

소설 현장을 "황성 옛터"에 비유한 문학평론가 권택영(경희대 교수)씨는
1960~70년대를 소설의 황금기로 꼽는다.

개발독재가 한창인 시절에 소설은 사회의 부조리를 먹고 자랐다.

잘 팔리는 책과 좋은 작품이 일치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대표적인 예다.

은유마저 닳고 닳아 힘을 쓸수 없는 1990년대에 소설은 "번지없는 주막"처럼
남루해졌다.

문인들은 지사적인 면모를 잃었다.

그럼에도 권씨는 "이야기 없이 살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며 "카멜레온 같은
변신술"을 소설가들에게 요구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디지털의 파고를 어떻게 넘을지 소설의 행보에
시선이 쏠린다.

< 윤승아 기자 a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