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씨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자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명작들의 출연배우 명단에 박씨만큼 자주 오르내린
연기자도 드물것이다.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피의 결혼"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때리는 연극들이 그가 무대에 서서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백상예술대상 4회 수상, 동아연극상 세차례 수상 등 그동안 쌓아올린 수상
경력도 박씨가 최고 연기자임을 증명한다.

남편의 외도에 절망하는 평범한 중년부인(위기의 여자)에서 사랑을 위해
몸을 던지는 여인(11월의 왈츠)으로 변신했다가 어느새 신화속 비극의 왕비
(페드라)로 모습을 바꾸며 객석과 평단 양쪽 모두의 찬사를 받아냈다.

이 최고의 배우가 가장 아끼는 소장품은 가면이다.

78년작 "피의 결혼"에서 썼던 종이가면은 언뜻보면 둥글고 넙적한 얼굴에
눈과 입에 구멍이 뚫린 평범한 탈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배우는 이 가면에서 "빛과 그림자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신비한
매력"을 찾아냈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가면의 모습이 어쩐지 배우의 운명과 닮은 것
같아서"라는게 그가 20년이 넘도록 고이 간직해온 이유다.

"초연이후 피의 결혼을 무대에 올릴때면 늘 이 가면을 쓰고 나갔습니다.
연극 소품은 고스란히 돌려 주는게 관례지만 이 가면만은 꼭 갖고 싶어서
이병복 선생님을 졸랐지요"

무대미술가 이병복씨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애정을 쏟게 만들었다.

40년간 무대의상을 지어온 이씨는 지난 66년 극단 자유 창단시부터 박씨와
희노애락을 같이해온 둘도없는 지우다.

인터뷰때마다 "자신의 옷을 가장 잘 소화하는 배우는 박정자"라며 자신에게
끊임없는 신뢰를 보내 주는 분이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혹시 다른 사람 소품과 섞일까봐 가면 옆 귀퉁이에 자신의 싸인인 정자를
조그맣게 새겨 넣기까지 했다.

지금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있는 그를 관객들은 4월에나 만날 수 있다.

박씨와 함께 이해랑 연극상을 탄 손숙, 윤석화씨와 함께 안톤 체홉의
"세자매"를 공연할 예정이다.

내달부터 연습을 시작한다는 박씨.

이번에는 어떤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설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설현정 기자 so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