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1993년)를 준비할 때였다. 판소리에 관한 영화라 도막소리를 많이
듣고 다녔다. 다섯마당중 완창을 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던중 조상현
명창의 춘향가 완창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띄였다. 뻔히 아는 얘기인데도
뭔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감동이
밀려왔다"

임권택 감독은 당시 "우리영화는 그동안 뭘 찍었냐"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숱한 춘향영화는 춘향 몽룡 두 주인공의 사랑놀음에 관한 것 뿐이지
않은가. 감독들이 한번이라도 판소리를 들었다면 그런 영화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판소리 춘향가에 내재된 고유의 리듬을 살린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서편제 그만두고 춘향전으로 돌리자"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때맞춘 장단에
"그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임 감독이 오랜 꿈을 이루었다.

자신의 97번째 작품으로 "춘향뎐"(춘향전)을 완성해 29일 극장가에 푼다.

임 감독은 "춘향뎐"을 "소리와 영상이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펄펄 살아
상승작용하는 영화"라고 강조했다.

임 감독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뭘 찍고 있는지도 몰랐다. 판소리의 리듬을 살려야 하는데 제대로
하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초반 2개월간 찍은 필름을 죄다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법했다.

새로운 내용이 없고 재미를 위해 꾸민 이야기와 영상을 덧붙일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할은 판소리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데 한정시켰다.

조상현 명창을 화자로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다.

조 명창의 춘향가 공연모습을 삽입해 소리를 깔고 영상으로 그 소리의
장단고저를 뒷받침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일종의 "뮤직 비디오"다.

그게 우리 고유의 1인 음악극(판소리)의 맛을 살리며 옛 정서를 현재에
살려내는 방편이라고 여겼다.

"무모한 시도"란 말도 나왔다.

실제로 시사회후 조 명창의 공연장 모습을 비춘 화면이 유치해 감정이입을
해친다는 지적도 적잖았다.

그러나 임 감독 스스로는 "저질러 놓고 보니 통한 것 같다"는 평가다.

영화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영상으로 생기를 얻었다.

정 감독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으로 판소리의
맛을 북돋웠다.

방자가 춘향을 부르러 가는 장면의 리듬감, 어사출두 장면의 박진감,
한양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몽룡의 뒷모습을 멀리서 잡은 장면의 쓸쓸함,
계절의 변화를 따라 비춘 대자연의 풍광들은 올해 한국영화의 최고장면으로
꼽아도 손색없을 것 같다.

이효정(춘향) 조승우(몽룡) 두 신인배우의 순박한 연기가 어울린다.

조승우는 단연 스타탄생이다.

안정된 대사처리와 신선한 얼굴로 몽룡의 이미지를 잘 소화했다.

국립창극단에서 활동중인 김학룡(방자)과 국악인 김성녀(월매)의 감초역할도
극의 감칠맛을 더해준다.

< 김재일 기자 kj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