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가지지 못한 삶이 서 있고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길 위로
밭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다
포도나무는 밭을 포도밭으로 만들고 있지만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이 와도
빈 집들은 이 마을을
빈 마을 이외에로는 만들지 못한다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겨울 동구

장석남(1965~)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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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가지지 못한 삶"이란 곧 잎 떨어진 나무를 뜻하는 것일 터이지만, 이
대목에서 사람이 없는 삶을 연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을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이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맛대가리가 없었을까.

썰렁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가지고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즉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겨울의 시골 동구를 생생하게 재현시켜 주고 있다.

신경림 시인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