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담겨진 그릇의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득 찬
연못의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비추어보아도 나는 역시 반통의 물에
가깝다. 스스로 충만해서 일렁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이고, 반쯤 모자라 출렁거리고 사는 어리석음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다"

시인 나희덕(33)씨의 첫 산문집 "반통의 물"(창작과비평사)은 그의 시처럼
진지하고 정갈하다.

서른 두 꼭지의 산문이 깊이있는 성찰로 다듬어져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높낮이가 뚜렷하거나 안팎으로 구부러진 모습이지만
그의 눈길이 가 닿으면 금세 단정해진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심성의 청정함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미세한 흙의 움직임에서 생명을 발견하고 탱자나무 가시에서 열매의
향기를 음미한다.

황홀한 노을빛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그네를 타던 일곱살 시절,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와 함께 일몰을 등에 받으며 귀가하는 길에서도 촘촘한 삶의
무늬를 찾아낸다.

그는 남의 땅을 빌려 밭을 일구면서 "비어있는 손"의 깨달음을 얻는다.

"밭을 처음 고르기 시작할 때부터 손으로 돌멩이를 수없이 골라내어 고랑
밖으로 던졌지만 실은 내 마음속에 그렇게 내던질 것들이 많았던 탓이다"

스무살 무렵 점자책을 만들던 일은 그에게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줬다.

앞 못보는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뜬 뒤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몰라 허둥대자
화담 서경덕이 "도로 눈을 감아보아라. 그리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걷다보면
곧 네 집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는 일화.

그 속에서 시인은 연초에 한 어른이 써서 보내준 "득안"의 의미를 되새긴다.

어렵게 마련한 뜰의 나무를 잃고 나서야 더 많은 나무를 얻게 되었다는
고백도 잔잔하게 전해온다.

시인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오래된 내복처럼 허물없는 "시힘" 동인들,
시의 행간에 담긴 생각, 책읽은 뒤의 수상들도 따뜻하게 읽힌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