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에 숨어 쳐다만 보는 유년의 첫사랑은 설렘의 기억만으로도 작은 동화가
된다.

그 대꾸없는 순백의 갈망은 그러나 세월 저편의 또다른 사랑을 아린 생채기
로 앓게 만든다.

다하지 못한 사랑의 흔적은 그렇게 와닿는다.

추억과 회한, 기쁨과 절망의 옷을 갈아 입고 서로에게 다가선다.

한쪽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이 부른 기억이라면 망각의 조화도 끼어들 힘을
잃는다.

영화 "러브레터"가 20일 개봉된다.

영화감독이라기 보다 영상작가로 불리길 고집하는 일본의 젊은 감독 이와이
순지의 장편데뷔작(95년)이다.

지난 9월 일본대중문화 2차 개방조치이후 처음으로 극장에 걸리는 일본영화
란 점에서 관심을 끈다.

특히 신세대 영화팬들이 일본영화중 가장 보고 싶은 영화와 다시 보고 싶은
영화 1순위에 올려 놓은 작품이어서 흥행여부가 주목된다.

영화는 등반사고로 세상을 뜬 한 남자의 두 사랑 얘기를 교차시킨다.

그 사랑의 모습을 길어내는 매개체는 편지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연인 이츠키가 등반사고로 죽은 지 이태가 지났지
만 아직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추도식을 마친 뒤 이츠키의 옛 주소를 발견한 히로코는 그곳으로 편지를
띄운다.

"잘 있나요?"

이츠키는 어떤 사람이었고 자신에 대한 사랑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뜻밖에도 이츠키의 이름으로 답장이 왔다.

그는 이미 죽었고 집도 헐려 길이 되었다는데 어찌된 일인가.

히로코는 이츠키의 기억을 쫓아 달려간다.

그곳에서 이츠키의 중학교 동창으로 이름이 같은 여자(나카야마 미호
1인2역)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안다.

두 여자는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히로코는 연인의 어린시절 얘기를 들으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여자
이츠키는 잊고 지냈던 옛 추억에 젖는다.

이츠키는 결국 그 이름 같은 남학생의 아련한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히로코는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연인에 대한 기억을 땅에 묻는다.

"이츠키에 대한 모든 추억은 당신의 것이네요"

영화는 다분히 소녀취향이다.

가을의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진다.

그 작은 일상의 소재를 대중성과 예술성으로 감싸 치켜 세운 솜씨가 절묘
하다.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히로코의 연인 이츠키의 사랑까지도 화면가득
묻어난다.

절제된 영상엔 슬픔과 웃음이 공존한다.

눈덮인 일본 시골마을의 풍광은 시리도록 아프고 또 정겹다.

카메라는 과거와 현재를 부단히 오가지만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상승시킨다.

사춘기 아이들의 학창시절 에피소드들도 맛깔스럽다.

페달을 돌려 만든 자전거 불빛으로 시험지를 맞춰보는 모습, 여자 앞에서
쭈뼛대며 수줍어하는 이츠키, 그 이츠키를 짝사랑하는 저돌적인 소녀 등은
시골동심을 옮겨 놓은 듯 하다.

1인2역을 한 나카야마 미호는 사랑을 발견하고 또 떠나보내는 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을 훌륭히 소화했다.

< 김재일 기자 kj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