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은 물이면서도 투명한 공기였고, 낡은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영원의 소리였다. 달빛 한 가닥처럼 얇고 푸른 그 길은
먼지처럼 떠돌던 내 남루한 정신을 신의 정신으로 변모시키는 마법의
통로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녀에게 한없이 은혜를 입고 있었다"

중견 작가 정찬(46)씨가 세번째 장편소설 "로뎀나무 아래서"(문학과지성사)
를 출간했다.

지난 95년 "슬픔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권력과 인간, 신과
구원 등 주로 관념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의 세계로 눈길을 돌렸다.

"로뎀나무 아래서"는 그가 처음으로 청춘의 원시림 속을 탐험하며
그려낸 러브스토리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 시험을 앞둔 정우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시작된다.

정우는 낙방하고 유흥가로 흘러든 여동생은 음독자살한다.

아버지까지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는 해안의 절벽에서 죽음과
대면한다.

그 순간 시험장에서 스치듯 만나 강한 인상을 받은 한 여인을 떠올린다.

무의식 속에서 홀연히 떠오른 존재 유영숙.

그는 그녀와의 해후를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해 마침내 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나 영숙을 만나지 못하고 동급생들과도 어울리지 못한 채 단절된
생활을 계속한다.

그런 그에게 한 여자가 다가온다.

구원의 여신을 자처하는 한영채.

그녀는 어릴 때 자신 때문에 교통사고로 죽은 동생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당돌하고도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숙의 환상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한영채의 사랑을 깨닫게 되았을 때 그녀는 "완전한 사랑"을
위해 혼자 겨울 설악산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이 소설은 격정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깊이있는 사유의 흔적이 서정적인 문체에 담겨 있다.

은유와 상징의 높낮이도 적절하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를 작품 속에 도입해 적재적소에
대비시킨 대목이 압권이다.

상처입은 한영채의 눈에 정우는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주인공 하리 할러로
비친다.

하리 할러는 "세상을 경멸하면서도 세상 속으로 끼여들지 못하는 고통의
천재".

황야에서 방항하는 이리를 닮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구원의 여인 헤르미네라고 자처한다.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까지 흉내냈다.

제목속의 로뎀나무는 무엇인가.

황야에서 자라는 유일한 나무, 풀 한포기 없는 그곳에서 그늘을 만들수
있는 천국의 나무다.

그녀는 이리를 구원할 최후의 그늘인 셈이다.

그녀가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다른 변신을 거부하고 헤르미네로 죽음을
맞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뎀나무가 등장하는 엘리어트의 시 "성회 수요일", 구약성서 "열왕기 상",
우리나라 배꽃과 비슷한 로뎀나무 꽃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 "사라져 가는 기억의 길 너머로 눈처럼 흰 꽃을 피우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어른거리는" 대목에 이 작품의 주제가 응축돼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