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은 울분과 상실감으로 뻥 뚫려 있다.

"쉬리"로 싹틔웠던 우리영화의 미래에 대한 부푼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생존의 기반이 뿌리째 뽑힐 것이란 암울한 위기감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단계적으로 축소할 것이란 정부의
방침 탓이다.

정부는 한미투자협정(BIT)타결을 위해 2002년부터 스크린쿼터를 축소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 연간 1백46일에서 60~80일 수준까지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의 정부입장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말 스크린쿼터 문제가 불거졌을 때 "현행유지"를 못박았다.

한국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40%선이 될 때까지는 현행 스크린쿼터를
고수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바로 5개월 전이다.

영화인들은 정부의 이런 돌연한 입장변화에 분노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겉으로는 염려말라고 해놓고 뒤로는 미국측과 물밑 거래해온데 대한
배신감이다.

영화인들의 총력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16일 동숭아트센터에서는 지난해말에도 삭발한 임순례 감독을 필두로
"쉬리"의 강제규 감독, 이충직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등 8명이 삭발했다.

18일엔 1백여명이 집단삭발하는 등 강경대응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들도 모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로 배수진을 치고
있다.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들이다.

정부가 대신 준비하고 있다는 "당근"도 미국측이 정부보조금 지급중지를
요구하며 공세를 취하면 밀릴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결국은 우리영화를 걸 극장도, 기초를 다질 돈도, 창조적 젊은이들의
관심도 모두 잃게 될 것이란 뜻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춰 "문화적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한미투자협정 협상테이블에 스크린쿼터축소를 들고
나가겠다는 것은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문화와 정신을 팔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7월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선물중 하나라면 더욱 꼴이 우습다.

영화는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뒷받침할 "밑바탕 문화"다.

경제적 논리와 잣대로 갈라 경제협상의 카드로 쓸 성질의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임순례 감독은 삭발식에서 "지난해 말의 삭발장면이 NG가 난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또다시 NG를 낼 수는 없다.

이번에도 NG가 나면 한국영화는 다시 찍을 기회 조차 잡을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 김재일 문화레저부기자 kji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