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백색 철책을 부여잡은 노병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예비역 육군 상사 양수한(78)옹.

휴전선 사이를 구비 흐르는 역곡천 너머 백마고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 앞엔
47년전 치열했던 전투가 다시 떠오른다.

적의 총부리 앞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스러져 갔던가.

"전우들아! 30연대 인사계가 다시 왔다. 너희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때까지 부디 고이 잠들어라!"

한국전쟁 당시 가장 격렬한 전장이었던 백마고지.

열흘동안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과 대치하며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던 격전장.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살아 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9~10일 이틀동안 백마고지 참전 전우 11명과 전쟁 미망인 2명은 KBS1
"TV내무반 신고합니다" 제작진과 함께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군복으로 갈아입은 노병들은 생사를 오갔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반 세기전
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참호로 몸을 피하다 적의 포격에 산화한 전우, 고지로 돌격하다 탄환을 맞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진 이름 모를 통신병...

저마다 가슴에 묻었던 사연을 하나둘 풀어낸다.

결혼 3년만에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던 신갑녀(72) 할머니가 50년전
결혼식 사진과 어엿하게 자란 손자의 사진을 손에 쥐고 남편을 부르며
오열하자 둘러선 일행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노병들은 중공군을 무찌르던 활약상을 이야기하면서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지금이라도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달려 나가야지. 이 나이에 도망갈거야?"

전쟁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던 이갑수(72)옹은 스무살 청년으로
돌아간듯 불끈 주먹을 들어 보인다.

참전 용사들은 야간 경계근무를 직접 체험하고 내무반에서 신세대 장병들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밤을 지샜다.

이튿날에는 후배 장병들의 사격 시범을 지켜보며 가슴 뿌듯해 했다.

노병들의 병영 체험은 오는 28일 KBS1TV를 통해 오후 7시 35분부터
방송된다.

< 철원=박해영 기자 bon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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