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다"

이남희(41)씨의 새 장편 "황홀"(세계사)은 동성애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는 동성애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넓게
조명한다.

제목도 물질과 쾌락의 과잉공급 속에서 반쯤 얼이 빠져버린 현대인의
정신상태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인공은 찬영 희진 경석 등 세 친구.

어릴 때부터 단짝이던 찬영과 희진은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키워간다.

이성간의 관계만을 정상으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이들 동성간의 "꿈"은
손가락질의 대상일 뿐이다.

결국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희진은 자살하고 만다.

이 죽음은 자본주의적 삶의 마감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겉돌던 찬영은 거처할 곳 없는 모델 안채리
를 만나 그녀를 보호해주다 인간적인 교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또한 이성적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중성적인 사랑이다.

이는 부부이면서도 섹스없이 친구처럼 지내던 희진과 서이경의 관계에서도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유기농법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는 경석의 삶은 도시속의 파편화된
인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것마저 유토피아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황폐한 현실과 머나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은 소설의
행간에서 비틀거리며 현대인의 자화상을 되비춘다.

이 작품은 두 건의 살인사건과 맞물리면서 "자살"과 "살인"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죽음"의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돈과 권력에 지배되는 지구를 "식인의 혹성"이라고 표현한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