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몰락으로 냉전은 오래전에 끝났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안녕을 위협할 정도는 못된다.

적을 잃어버린 군인들은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전쟁과 첩보전을 위해 투입되던 막대한 예산이 줄어들어 먹고살기도
빠듯해졌다.

영웅적인 애국심을 보여줄 기회도 줄어들었다.

매파들은 그래서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선다.

영화 "비상계엄"에서도 이러한 "의혹"이 거론된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아랍인들의 자살테러를 중심으로 자가당착에
빠진 군부와 FBI로 대변되는 양심세력이 대결하는 이야기구조다.

CIA도 빠질 수는 없다.

영화 복선들을 더욱 복잡하게 꼬아주는 이중첩자 역할이다.

영화는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서 아랍인 과격파들이 버스를 점거하며 시작
된다.

다른 테러사건과는 달리 범인들은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는다.

그저 불나방처럼 자살공격을 감행할 뿐이다.

FBI 테러대책반의 허브반장은 수사도중 의문의 여인 엘리스를 만난다.

자신을 CIA요원이라고 밝힌 그녀는 은밀히 아랍측 인사들을 접촉, 수사를
혼란에 빠뜨린다.

경찰 수사가 답보를 거듭하며 말단 끄나풀만 잡아들이는 동안 테러는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관객으로 가득 찬 브로드웨이의 극장이 폭파되고 FBI본부도 테러공격을
받는다.

뉴욕시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진주한다.

지휘관 데보로 장군은 모든 아랍인을 격리시킨채 불법적인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며 테러범 색출에 나선다.

그러나 분노한 소수민족들은 인권을 되찾기 위한 시위에 나서고 과격파들은
최후의 테러를 준비한다.

허브반장은 사태의 원인이 군부의 야심과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아랍내
적대세력을 육성했던 CIA의 비밀작전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고 데보로 장군의
체포에 나선다.

할리우드가 여러번 써먹은 모티브이지만 영화는 호화캐스트와 컴퓨터그래픽
대신 실제 군중신 등을 최대한 활용한 사실감높은 화면에서 흥행요소를
찾았다.

허브반장역은 "말콤X" "펠리칸 브리프" 등에서 열연했던 덴젤 워싱턴이
맡았다.

메가폰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잡았다.

덴젤 워싱턴과 세작품을 함께 촬영할 정도로 명콤비를 이루고 있다.

CIA요원 엘리스역은 아넷트 베닝이다.

"벅시" "화성침공"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답던 얼굴에서도 이제는 세월이
느껴진다.

야심많은 데보로 장군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브루스 윌리스.

오랜만에 주연자리를 내놓고 차가운 성격의 조연배우로 등장했다.

< 이영훈 기자 bria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