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문화계의 중심엔 "기획자"가 있다.

IMF한파로 문화계가 극도로 피폐해지면서 기획자들은 궁핍한 시대를 헤쳐갈
"해결사"로 떠올랐다.

작은 제작비로 최대한의 흥행을 거둬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예술과 마케팅
을 함께 아는 기획자들의 줏가는 하늘을 찔렀다.

기획자들은 원래 문화상품을 소비대중에게 포장.판매하는 마케터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90년대 들어 문화시장이 양적으로 팽창하며 본격적인 대중문화산업시대가
열리자 예술가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것.

그러나 최근엔 영화나 소설의 내용마저 좌우하는 "프로듀서"로까지 활동영역
을 넓히고 있다.

창작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대중의 입맛에 맞는 문화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프로듀서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영화계였다.

올해 충무로도 영화제작편수가 예년의 절반수준인 50여편으로 줄고 관객들이
빠져나가며 불황을 겪었다.

하지만 2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뒤에는 예외없이 프로듀서가
있었다.

관객 1백20만명 돌파기록을 세운 "약속"의 신철(신씨네), "조용한 가족"의
심재명(명필름), "찜"의 황기성(황기성사단) 등이 대표적이다.

"여고괴담"의 이춘연(씨네2000) 등은 프로듀서의 감각을 지닌 제작자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은 금융회사나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동원하는 파이낸싱에서부터
영화제작의 전과정을 조율하는 현장소장으로, 홍보와 광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케터 등으로 1인다역을 해냈다.

심재명 명필름 이사는 "한국을 포함 대중문화산업이 발달한 나라는 직능별로
전문화와 분업이 이뤄지는 할리우드의 제작시스템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며
"문화현장에서 기획의 중요성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학로에선 전통적인 극단체제가 와해되고 기획사를 중심으로 배우, 작가,
연출가가 모였다 흩어지는 프로덕션 제작시스템이 급부상했다.

제작자가 작품의 방향을 정하면 스탭들이 이를 꾸며내는 연역적인 제작방식
이다.

윤도현의 락뮤지컬을 기획한 오세정,연극 "매직타임"의 이현기, 열기획의
이종열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정동극장, 예술의 전당, 문예회관 등 대형 극장들이 자체적으로 기획공연을
올리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도 새로운 양상이다.

박정영씨(공연기획자)는 "대규모 자본과 출연진이 동원되는 뮤지컬이
활성화되며 기획자 집단이 급부상했다"고 말했다.

출판가에서도 기획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아이디어는 좋으나 표현에는 서투른 대중작가들을 대신해 작품을 다시
써주는 "이너써클"까지 생겼다.

프로듀서의 등장은 예술생산의 시스템이 바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작품이 획일화되며 대중에 영합하여 가벼워졌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 영화기획자는 "기획만으로 IMF시대를 헤쳐나갈 수 는 없다"면서 "작품
완성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해종 해냄출판사 편집장은 "문화시장의 구조적 불황도 새로운 시장창출과
생산품 혁신으로 돌파해야 한다"며 "대중을 뒤따라가기 보다는 선도해
나가는게 문화기획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 이영훈 기자 bria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