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 세당마을에 가면 채운토방이라는 흙집이 있다.

서쪽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산중턱.

작가 곽의진(51)씨의 집필실이다.

석양빛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그는 2년반동안 극도의 외로움과 싸웠다.

그래서 얻은 작품이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전5권 해냄출판사)다.

이 작품에는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유(1809~1892)의
불꽃같은 예술과 사랑이 담겨 있다.

그동안 많은 역사소설이 나왔지만 정신문화에 초점을 맞춰 예술가의 삶을
집중 조명한 작품은 드물었다.

시.서.화에 능해 삼절로 불렸던 소치가 2백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이야기는 소치의 예술적 생애와 지순한 여인 송은분의 사랑을 축으로
전개된다.

기둥 줄기는 절해고도의 촌 무지렁이가 19세기 최고의 화풍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소치는 초의 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철학을 자신의 화폭에
변용하면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일궈간다.

그는 초의에게 고요함과 정갈함의 아름다움을 배웠고 추사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익혔다.

그런 그에게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바치는 은분의 순애보는 애틋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예술혼을 찾아 스스로를 불사르는 소치는 은분의 여성스러움에 깊이
끌리면서도 돌아서서 고난의 길을 떠난다.

은분은 불도를 닦는 여승이 되어 소치 앞에 나타나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은분은 소치의 정념을 더욱 뜨겁게 불태우는 아궁이와 장작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서쪽 바다의 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연민과
화해의 몽환적인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백미다.

이 작품은 오래된 화첩을 넘기듯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제맛이 난다.

곽씨가 소치의 삶과 예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9년 전.

TV다큐멘터리 제작에 간여하면서였다.

그러나 집필은 3년전부터 본격화됐다.

빚에 쪼들려 출판사를 정리하고 절망의 낭떠러지에 서 있던 95년말.

그는 절친한 글벗 안혜숙씨의 배려로 신문연재 기회를 얻었고 곧바로
봇짐을 싸 고향 진도로 향했다.

묘하게도 소치가 이곳 운림산방으로 낙향했던 때와 같은 나이였다.

그는 "소치에 빠져들면서 머리가 깨질 것같은 신열과 함께 가슴이 몹시
뛰었다"며 "삭발면벽 좌선하는 자세로 이 작품을 썼다"고 고백했다.

바람만 눈뜨고 있는 한밤중, 글이 풀리지 않아 산중턱을 어슬렁거릴
때면 20여가구의 마을 노인들로부터 "밤중에 걸어다니는 여자"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5대에 걸친 허씨 일가의 거대한 화맥을 온전하게 그리고
싶어한다.

특히 남농과 함께 3대인 임인 허림에게 깊이 매료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삼별초''와 관련된 작품도 준비중이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