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육군중장으로 남방총군병참감 겸 포로수용소장이었던 홍사익
(1889~1946)은 경기도 안성의 빈농 출신이다.

일본 무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26기)를 졸업했으며,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육군대학을 나왔다.

그러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살.학대죄로 46년 교수형을 당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야마모토 시치헤이 저,문예춘추 출판)은 전범재판을
"승자인 미국의 논리로 패자를 심판한 말도 안되는 정치쇼"라면서 "홍중장은
무죄이며 시대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이 책의 초반부에는 홍중장의 성장 배경과 성격, 생도 때의 활동, 장교시절
에피소드 등이 소개돼 있다.

중.후반부에는 미군 법정에서의 신문 내용과 포로 일기를 포함한 재판
기록들이 기술돼 있다.

일본군내 한국계 장교의 정신적 갈등과 이들에 대한 일본 군부의 처우,
활약상도 인용돼 눈길을 끈다.

우리가 이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금세기를 마감하며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한일관계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애국지사의 유해봉환,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상, 징용으로 끌려간 생존
동포의 영주귀국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비해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희생자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 때 희생된 2만여명의 한국인 군인과 군속은 조국의 무관심 속에서
지금도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돼 있다.

그러나 일본육사나 학도병 출신으로 살아남은 자는 해방후 엘리트로
대접받고 조국에서 건군의 주역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홍사익의 일본육사 동기생으로는 광복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이청천 장군과
해방후 한국육군을 창건한 초대 참모총장 이응준 장군이 있다.

홍사익은 계림회라는 유학생 친목회의 리더로서 친구 이청천과 김광서 등
서울에 남아 곤경에 처한 선후배 광복군 지도자의 가족들을 비밀리에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한국식 이름을
고집했다.

대한제국 유학생으로 교육받던 중 국권피탈의 비운을 맞은 그는 여단장을
거쳐 이른바 구름위의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일본군 고위 장성에까지 오른
한국출신 장교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는 일본이 항복하자 부관에게 고국에 돌아가서 수학선생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저자는 태평양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하여 루손섬에서 미군의 포로가 됐던
인물.

그는 이 책을 한 사람의 전기가 아니라 전범재판에 초점을 맞춰 집필했다고
밝혔다.

미국 국립자료보존소에 보관된 1천여 쪽의 방대한 기록을 발췌해 번역하고,
일본 국내 관계자의 증언기록과 인터뷰, 서울에서의 관련 인사 취재결과를
담았다.

저자의 주관적 추측과 논리적 비약, 영문 재판기록을 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호해진 부분도 있지만 사료적 가치가 큰 내용이 많다.

포로들의 생활상을 그린 부분은 전쟁의 참혹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황인영 < 일본문화연구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