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적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
최경회의 후실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동주씨는 최근 저서 "논개"(한길사)에서 올해초 처음
공개된 "임진록"을 근거로 이같이 주장했다.

85년 장편서사시를 통해 "논개는 결코 관기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던 그가
최신 자료를 토대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해 더욱 눈길을 끈다.

17세기 문인 민순지의 "임진록"은 지난 1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일본 기타지마 만지 교수에 의해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여기에는 "왜적이 성에 들어와 진주의 기생과 미녀를 다투어 노략질했다.

논개라는 여자가 일부러 예쁘게 꾸미고 있자니 적장이 좋아라며 다가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대목에 주목한 정씨는 논개와 의병장 최경회의 관계를 연대기적으로
추적, 신안 주씨 후손인 양반 가문의 논개가 그의 두번째 아내였음을
밝혀냈다.

그는 "호남출신 최경회가 영남 장수들에게 배척당해 패전하자 후실인 논개의
거사도 의미가 격화됐다"며 "1621년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논개를 진주
관기로 못박은 이후 1백80여종의 관련 자료가 이를 잘못 답습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