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고영훈씨(46)의 작품은 재미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예외없이 깊은 호기심을 느낀다.

책 낱장을 정교하게 잘라붙인후 음영을 집어넣고 그 위에 그린 돌맹이,
타자기에 얹힌 깃털, 박제된 새날개.

분명히 화면위에 그려진 그림인데도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인다.

간혹 진짜 물건이 오브제로 사용될때도 있지만 그림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

극도로 세밀한 묘사력에 속아넘어간 관객은 실소를 터뜨리면서, 한편으론
재미있어 하고 다른 한편으론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추상이나 반추상, 설치작업 같은 분야도 있는데 그는 왜 극사실의 그림을
고집하는가.

"화단에 사실주의계열 작품을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화의 흐름이 어떻게 바뀐다해도 이같은 분야의 그림은 언제까지
존재할 겁니다.

우선 보는 사람이 즐겁거든요.

그 원류는 신라시대 황룡사 벽에 나무를 그려 새들이 날아들게 했다는
솔거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극사실이라해도 그가 현실의 한 부분을 있는대로 옮겨놓는 것은 아니다.

소재의 조합에선 더 없이 새롭고 실험적이다.

책 돌맹이 숫가락 깃털등 서로 이질적인 사물을 두개, 또는 서너개씩
조합해 한 화면안에 그려넣는다.

그래서 작품은 초현실적 이미지를 얻어내고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유발한다.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개인의 역사"이다.

이 땅 한 켠에 몸담고 살다가 스러져간 우리의 이웃.

서울 양천구 신정5동 30여평의 작업실에는 그들이 남기고 간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빛바랜 책들과 담배갑, 헌 장갑, 녹슨 칼과 국자, 찌그러진 주전자,
박제된 새날개 등 수백점의 물건이 놓여 있다.

이들 "쓰레기 같은 물건들"에 빛나는 생명을 불어넣고, 이름없는 이웃의
삶에 역사의 무게를 실어주는 작업을 그는 꼼꼼하게 해나가고 있다.

특히 최근엔 순백의 화면위에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사물들만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작품을 그리고 있다.

이들 신작은 과거 작품에 비해 주술적 힘을 간직한 제물같은 느낌을
더 강하게 전해준다.

"앞으로도 개인의 역사나 삶의 흔적들을 꾸준히 그릴 겁니다.

오는 11월 가나화랑에서 여는 전시회에선 기존 작품과 요즘 그리고 있는
신작등 30여점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국내보다 외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고, 현대미술의 본고장에서 더 인기가
높은 화가.

그는 뉴욕 파리 네덜란드 영국의 주요 화랑에서도 전시회를 제의해와
내년부턴 다시 해외전이 이어질것 같다고 밝혔다.

< 이정환 기자 jh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