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란은 꽃이 화려하지만/향기가 나지 않는데,/동양란은/꽃은
볼품 없지만/강한 향기를 풍긴다/따라서 먹물의 농담만을 그리는/동양의
난초꽃에서는 향기가 나야만 한다./며칠 전 호암 아트홀에서 본/높다란
탁자 위에 피어 있던/석파의 그 난초꽃처럼!"("난초꽃"전문)

원로시인 김종길(82)씨가 오랜만에 신작시 5편을 발표했다.

계간 "문학과의식"가을호 특집에 실린 김씨의 작품은 팔십 고개에서 건져
올린 관조와 무념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10년전 함양 남계서원에서 본 백일홍 고목을 떠올리며 "나무로 치면
고목이 되어버린 나도/이 8월의 폭염 아래 그처럼/열렬히 꽃을 피우고
불붙을 수는 없을까"("목백일홍")하고 생각한다.

팔순을 넘긴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도 깊은 울림을 발견한다.

"사실에만 충실하다고 해서/예술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저 빨랫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헌 옷가지들이 받는/따스한 저녁해를/무엇이 이토록
참답게/기록하고 보존해주랴."("사진")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올곧은 자세를 지켜 온 그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순정한 시정신을 맑게 승화시킨 노대가"로 불린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안동 지례에서 태어난 그는 동양적 선비정신과
현대 영미문학의 모더니즘 정신을 한 폭의 수묵담채화에 담아내듯
조화시켜왔다.

신작시와 함께 발표한 "작가 자서전"에서 그는 어릴 때 배운 한학과 대학
때부터 심취한 TS 엘리어트가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영미 모더니스트들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는 뜻밖일 정도로 동양시의
전통에 뿌리를 깊게 두고 있다는 평가도 이 때문에 나왔다는 설명이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7일자 ).